2009년 4월 3일 금요일



자전거 탈 때 입는 방풍 외투에 청바지, 게다가 여름용 중절모라니. 어색한 조합이네. 괜찮아. 몇 시간 후에 비행기는 바닷가에 내릴 테고, 내 작은 가방 속엔 여름 바다에 어울리는 하얀 셔츠 두 장과 움직이기 편한 반바지가 들어 있으니까.

하늘을 가득 덮은 비행기의 구름을 상상하면 될까? 하늘이 막혀서, 너무 많은 비행기 때문에 하늘이 밀려서 제 시간에 이륙할 수 없다니. 대충 책을 읽고 편지도 쓰면서 시간을 때우면 된다지만, 편지 쓰고 책 읽는 걸 꼭 고함지르며 통화하는 아저씨를 뒤에 둔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할 이유는 없잖아?

오늘의 테마는 기다림.쯤으로 하면 되나? 한 시간을 늦게 뜬 비행기에서 내려 호텔에 오니 예약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 내가 예약한 게 아니니 내가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저들끼리 엉킨 연락을 풀고 방을 마련하는 동안 너르고 높은 로비 한 켠에 구겨진다. 조급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방에 가서 할 일이란 게 널부러져 책이나 뒤적거리는 건데, 로비에도 여름바람은 불고 책은 여기에서도 읽을 수 있으니까.

짐 풀고 나를 여기까지 불러온 사람의 비서를 만나서 가볍게 차 한 잔.까지는 좋았다. 나른한 휴가에 대한 환상은 딱 여기까지. 이야기하다 보니 뭔가 박자가 안 맞는다. 행사? 촬영? 무슨 말인가? 니네 비서는 그냥 가서 골프 치라던데? 난 못 친다니까 그럼 그냥 쉬고 가라던데? 내 짐을 봤냐? 나 그냥 가방 하나로 왔단 말이다! 휴가가 아니라 일 때문에 불렀다는 통보. 나와 연락한 다른 비서와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 그냥 와서 놀고 가라던 약속은 어디 간 거지? 그럼 그렇지. 내 팔자에 무슨 골프 대회며 대가 없는 휴가라니. 더 의심하지 않은 내 탓이다. 그나저나 어쩌나, 휴가라고 떡하니 믿고 장비도 안 가져 왔는데. 일은 터져 버렸다. 호텔 행사를 주로 찍는 현지 포토에게 급하게 연락해서 장비를 빌려보려고 하지만 불가능. 사방에 수소문해도 불가능. 제발, 아무 거나 괜찮으니 DSLR 바디 하나랑 렌즈 두 개만 빌려 봐봐. 제발. 응? 내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 땀을 저들은 아나? 게눈 달린 똑딱이 DP1 하나 밖에 없다니 어디서 들은 말은 있어서
“아, 그거 라이카 아냐? 그것만 해도 좋아.”
라이카는 개뿔. 모양만 대충 네모나고 게눈이나 달려 있으면 전부 비슷한 줄 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믿어주니 고맙다.

계획을 수정하고 작전을 세우자. DP1의 결과물은 아쉬울 게 없는 수준이지만, 바디의 기계적 성능은 누구나 인정하는 최악. 게다가 28mm 단렌즈 화각. 고감도 노이즈는 상상 이상인데가, 한 장 찍으면 저장하는데 5초는 걸린다. 조루 베터리 겨우 두 개, 그리고 100장도 채 안 남은 메모리 카드. 이 일은 어쩐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어떻게든 해낼 걸 안다는 듯 바라보는 저 눈빛들을 어이 하리오. 알았다. 그렇다면, 최대한 광각의 특징을 살린 사진을 찍자. 그래서 광각의 매력을 한껏 드러내서,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하자. 그러니까 광각 하나 밖에 없다는 걸 들키지 않고, 광각의 사진만이 매력적이어서 다른 화각은 필요도 없었다는 인상을 만들어 주자. 아, 적어 놓고 보니 뭔가 그럴 듯하다.

섬에서 빛은 깊이까지 닿는다. 흐린 날 잠깐 동안 드러나는 빛 아래서조차 온갖 색들이 바로 그 색.으로 드러나고 온갖 대기의 질감도 바삭거린다.

주어진 과제는 골프대회 스케치. 그것도 한 사람만. 골프와 관련된 광고사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빛이 낮게 들어오는 이른 아침 시간을 노린 것들이다. 멀리에서부터 걸어오는 인물이 부각되고 빛은 겹쳐진 언덕들의 세밀한 질감을 화면 안에 드러낸다. 여기에서 문제는 생긴다. 내 손 안에는 심도 확보도 안 되는 28mm 단렌즈 똑딱이 하나가 들려있을 뿐이고, 그들의 상상 속에는 잡지 속 광고 사진이 들어 있을 뿐이고, 행사는 열 시에 시작해서 축하 인사 몇 마디 하고 필드로 나가니 해는 중천에 떴을 뿐이고. 적어놓으니 제법 그럴 듯했던 작전은 흔적이 없다. 실패는 단호하고 명백하다.

저녁 행사가 시작되기 전 빈 무대를 채운 남방계 밴드. 남자 셋이 악기를 연주하고 여자 보컬이 노래한다. 가수란 멋진 사람들이다. 무엇도 없이 오로지 목소리 하나로 공간의 질감을 바꾼다. 그러니까 그 작은(또는 큰) 몸 안에 거대한 힘을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필요하면 그저 소리를 열어내면 끝이다. 한 방이다. 장비 안 가져왔다고 한 방에 바보가 되어버린 사진가는 괜히 작아진다. 노래를 배워볼까?







마지막 날은 일정이 없고 돌아가는 비행기는 저녁 예약이라 종일 빈둥거린다. 아침 먹고 바닷가에 누워 제대로 노닥거리기. 바람이 세게 불어서 모래가 온 몸으로 침투한다. 파도도 높다. 저 바다 속으로 러시아 관광객들과 중국 관광객들이 뛰어든다. 제 돈 주고 왔다면 나라도 시간 아까워서 한 번이라도 더 바닷물로 뛰어들겠다만, 아침부터 바닷물에 뛰어들 생각은 별로 안 난다. 게다가 흐린 하늘에 이 바람에서야. 대신 점심 먹은 뒤부터 오후 시간 내내 호텔 수영장을 전세 내기.

반바지를 벗고 슬리퍼도 집어 넣는다. 짐 정리하고 상하이로 돌아가서 입을 외투를 다시 챙겼다. 체크 아웃 전 마무리는 야외 테이블에서 라면 한 그릇이다. 바람이 좋다. 이 바람 앞에 왜 조금 더 일찍 나 앉지 못 했다 싶은 바람이다. 걱정했던 일은 끝났다. 돌아가서 작업해 보아야 정확한 사태를 짐작할 수 있겠지만, 마무리는 된 셈이다. 그랬다. 모든 시간은 지나간다. 그래서 가끔 힘들 때는 ‘지금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대부분의 버티기는 일종의 성취감으로 이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지금을 버티자’ 정도까지는 봐 줄 만한데, ‘’어떻게든’ 지금’만’ 버티면 된다’는 정도까지 가면 이건 좀 문제가 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버티기의 반복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조금씩 허문다. 그렇게 버텨서 얻어낸 결과물이 기대치를 만족시키는 경우는 많지 않다.

모든 지나가는 시간 앞에서, 나는 그 모든 마디에서 힘주어 디디고 싶다.



파란만장 하이난 출장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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