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5일 수요일

블로그를 통한 책읽기 모임

상처.에 대한 일반론적 백과사전

어촌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사진가를 통한 사진사 정리

다시, 검도


요즘 할까 말까 고민중인, 또는 하기로 결심한 것들.



열흘 넘게 비 온다. 일주일 또 비 올 모양이다. 한국에 봄 온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여기는 낮 기온 10도 아래에서 맴을 돈다. 이 비가 끝나면, 봄이 와락, 올 것 같다. 비구름 너머에서 숨 죽이고 덤벼들 때를 기다리는 봄이 있다. 와라, 봄.

2009년 2월 22일 일요일

dp1





새 카메라는 시그마에서 만든 무늬만 똑딱이 DP1이다. 새로 샀다.

내 밥줄로 쓰고 있는 SLR이 갖는 몇 가지 단점을 극복해보려는 시도다.

3년 넘게 일상적으로 45mm 화각을 써 왔다. 멀리 있는 것을 당기지 못 하고 가까이 있는 것을 밀어내지도 못 하는 화각이어서 이 랜즈를 쓰는 동안 나는 피사체 앞에 정면으로 마주서는 연습을 했다. 이집트인들이 그려내던 정면의 그림들처럼, 렌즈는 피사체를 보기 좋게 포장하지 말고 단지 본질 앞에 서기를 요구했다. 스며들기도 했고 덥쳐들기도 했던, 본질을 보겠다는 시도는 많은 부분에서 실패했다.

새 카메라는 28mm 고정 화각이다. 광각이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넓게 보이고 멀게 보인다. 코 앞에 섰던 피사체가 저만치 물러나며 나와 피사체 사이에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던 공간을 도드라지게 한다. 작은 카메라를 쓰는 것도 처음이고 광각을 주로 구사하는 것도 처음이라서 카메라는 손에 잘 안 익는다. 작은 새 카메라가 내 손에 익숙해지고 28mm 화각이 눈에 익는데는 제법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낯선 것과 만나서 익숙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긍정해야 한다. 부대끼는 어색함과 불편함도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맞아갈 것을 알고, 그 곳까지 가는 시간의 길이도 자연스러운 것을 알겠다. 다만 익숙하던 것이 멀어지는 데 걸릴 더 긴 시간도 함께 긍정할 수 있기를 빈다.



지난 일주일은 내내 비 내렸다. 토요일 낮 동안 잠시 맑고 다시 비다.

다음주 일기예보도 일주일 내내 비다.

하늘이 테러한다.

2009년 2월 20일 금요일




내가 사는 집 씽크대. 한 끼 식사에 그릇은 하나씩. 더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설거지 미루기.


요 며칠은 하는 일 없이 논다. 논다.기 보다는 빈둥거린다. 노는 것만도 못 하다. 여기 저기 사이트나 뒤적거리고 다른 사람들 블로그나 둘러 다닌다. 지나간 쇼프로그램도 보고 책도 몇 장 뒤적거린다.

베토벤바이러스.드라마를 대충 돌려가며 다시 봤다. 대사 중에,
"버나드 쇼가 죽을 때 이런 말을 했어.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뜨끔.했다.

돈 버는 일이 많이 없다고 기죽어서 늘어져 있지 말아야겠다. 돈 버는 일이 많이 없으면 그 만큼 시간이 남고, 그 시간에 돈 안 버는 일이라도 하면 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오늘을 후회하게 된다면, 돈을 못 벌어서 후회되는 시간이 아니라 채우지 못하고 빈둥거리며 성글게 보내버린 시간이기 때문일 테다. 좀 더 바지런하게 책도 보고 사람도 만나고 사고도 쳐서 풍성한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글도 부지런히 쓰고 사진도 신나게 찍어야 한다. 우물쭈물하면서 보내면 안 된다.

낙서처럼 적어두는 걸 보니 이 글은 며칠 지나서 지우겠구나.

왜 쓰나?

2009년 2월 19일 목요일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진행형일 겁니다. 한 사람 보고 느끼는 호감부터 시작해서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서먹하고 다시 화해하고 또 사랑하고 나중에 헤어지고 헤어진 다음에 그리워하고 후회하고 그러다가 잊고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나는 것까지. 그 시간들을 빼고 나면 깨어있는 시간이 참 짧을 것 같습니다.

2009년 2월 18일 수요일

용왕산

강의 시작, 그 곳에 산이 있다.






운무가 많은 날에 호수는 넓어서 다만 아득하다. 가장자리를 치는 물결은 조용해서 이 물들은 어디로도 갈 마음이 없어 보인다. 흘러서 강이 되고 다다라서 바다가 된다는 사실은, 호수의 보이지 않는 저 편에 땅이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단지 배워서 아는 것이다. 눈은 강의 반대편에 닿지 못 하고, 의식은 바다에 닿는 강을 쫓아가지 못 한다. 디엔산호淀山湖. 황푸강黄浦江의 발원지로 알려졌던 곳이다. 호수의 바닥에서부터 솟아난 것이 아니라면, 이 물도 어디선가 왔을 것이다. 호수에서 강으로 흘러 드는 물줄기를 확인한 자전거는 호수로 흘러 드는 물줄기의 꼬리를 잡아며 나아간다. 호수의 서편 끝에서 상하이의 행정구역은 끝나고 있다.

강의 시작을 찾아가겠다는 발상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어디든 가야 했고, 강의 시작은 그럴듯한 목적지처럼 보였다. 그곳에 가면 만능열쇠 같은 답이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문제라도 다 풀어낼 수 있는 답이, 강이 시작하는 거기라면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3일 동안의 여행은 그렇게 출발한다.

1일차

지난 밤까지 비가 내렸다. 비 내리고 추운 날씨 눈치 보느라 자전거는 준비가 끝난 상태로 1주일을 기다렸다. 비는 새벽에 그쳤다. 이제 며칠은 맑을 것이다. 집 나선 자전거는 상하이의 남서쪽 끝으로 뻗은 지하철 9호선을 타고 서산佘山역까지 가야 한다. 오늘 기온은 4도에서 11도. 시의 바깥쪽으로 나가는 새벽 지하철에는 사람이 없다. 몇 정거장 가도록 타는 사람은 없고 반대편에 서서 시내로 들어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만 보인다. 가져온 시집 한 권은 쉽게 보아지지 않는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자전거가 꾸벅꾸벅 존다.


8시에 서산역을 출발한 자전거는 얼마 안 가서 주자자오朱家角를 지난다. 상하이 주변 여섯 곳 옛 운하마을 중에 시내와 가장 가까운 곳.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은 아직 오지 않고, 관광객을 맞기 위한 준비가 조용한 가운데 단단하다. 자전거는 골목길 돌아다니며 기꺼이 길을 잃고 한동안 놀았다.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첫 목적지 디엔산호. 자료에 따르면 상하이 행정구역의 서쪽 끝에 있는 이 호수가 예전에는 황푸강의 발원지로 알려졌었다고 한다. 인공수로처럼 보이는 쭉 뻗은 물길을 흘러서 디엔산호의 물은 황푸강이 된다. 이후에 디엔산호보다 더 서편에 있는 타이호太湖가 발원지일 것으로 추정되고, 1990년대 한 학자의 연구와 답사에 의해 마침내 절강성 안지현安吉의 롱왕산龙王山 계곡이 진짜 발원지로 밝혀진다. 자전거는 디엔산호와 타이호를 거쳐 산 속으로 갈 작정이다.



호수의 한 편에 자전거를 눕히고 쉰다. 가장자리를 치는 물결 소리가 편안하다. 자전거를 타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 중에 하나는 자전거의 질주본능이다. 달리는 연습만큼 멈추는 연습도 필요하다. 자전거는 올라타면 자꾸 달리려고 해서 마음 속에 정한 목적지 전에는 쉬이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저녁까지 달리고 돌아보면 내가 지나온 길은 보이지 않고 지친 몸만 보인다.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다. 어서 가려는 자전거를 잡아 채며 오늘 여행은 가다 서다를 반복할 것이다.



상하이에서 후조우湖州까지 이어진 318번 국도를 따라 달리던 자전거는 태호를 보기 위해 방향을 비튼다. 이제부터는 230번 성도다. 길 주변은 작은 호수들 천지다. 중국 남방 지역에 통일왕조가 성립되기 어려웠던 것은 늪지가 많았기 때문이라던 학부 시절 강의 내용이 떠오른다. 사방 펼친 호수와 수로에서 배는 오가고 소리도 없는 풍경 속에서 어부는 그물을 당긴다. 풍경은 날 때부터 거리를 내재한 단어다. 풍경을 인식하는 것은 나와 장면 사이의 거리를 느끼는 것이고, 내가 그 안에 들어갔을 때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닐 것이다. 안개 속에서 느리고 고요하게 그물을 끌어올리는 저 장면 속에 나는 영영 닿지 못 할 것이다.

태호의 남동쪽 끝부분에서 보는 호수는 너무 커서 그 실체를 가늠할 수 없다. 지도를 펼쳐서 내가 있는 자리와 호수의 크기를 비교해 보면 대충의 크기가 나오는데 그 대충의 크기라는 것이 ‘가도가도 끝 없는’ 정도의 크기다. 관념의 크기를 몸의 가까운 곳으로 끌어들여 보려는 시도는 엄두도 못 낸다. 물가에 앉아서 오는 길에 산 사과 하나를 깎아 먹는 것이 타이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고작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보기나 한 것일까?

겨울 해는 짧다. 느릿느릿 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자꾸만 기우는 해와 오늘 저녁 숙소까지의 거리를 번갈아 보고 생각하니 머뭇거릴 틈이 없다. 다시 318번 국도, 점심 거른 속이 걱정되지만 조금씩 등장하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 이쯤 되면 허벅지는 뿔나서 말을 안 듣고 엉덩이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하늘이 짙은 남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하려는 무렵에 후조우 시내에 도착했다. 위험요소가 많은 야간 라이딩을 피하기 위해 두어 시간 힘껏 오니 속은 울렁거리고 다리는 풀려서 서 있기 힘들다.

낯선 도시의 낯선 것들이 주는 기대감도 느낄 여유가 없다. 몸이 지치면 익숙한 것에 안주한다. 숙소는 MOTEL168, 저녁은 맥도널드. 나도 이러는 내가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할 수만 있으면 한 입에 음식들을 털어 넣고 숙소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몸 담그면 좋겠다. 아, 이 숙소에는 욕조가 없구나. 내일은 더 짧은 길을 더 힘들게 가야 할 것이다. 목적지 산의 고도가 1500m 이상, 그리고 현재 고도라고 해야 고작 200m 남짓일까? 마주치게 될 경사를 생각하면 내일이 한 일주일쯤 뒤에나 오면 좋겠다.

주행거리 147km / 페달 구른 시간 7:41



2일차

날이 밝기를 기다려 자전거는 출발한다. 장거리 자전거 여행에서 이튿날과 삼 일째 되는 날의 여행이 가장 힘들다. 몸이 자전거에 익숙해지기 전이고, 첫 날의 피로가 쌓인 다음이기 때문이다. 시내를 벗어난 도로는 아침 안개로 덮여있고, 그 뒤로 흐린 산들의 윤곽이 겹쳐 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날 길들의 경사를 알겠다. 뿔난 엉덩이를 달래가며 안장에 얹고, 자전거는 104번 성도省道를 따라 간다.





후조우를 떠난 지 네 시간. 안지현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한 황푸강디이피아오黄浦江第一漂 표지판. 예상보다 많이 가깝다. 이대로 간다면 점심 무렵에는 도착할 수 있고, 오늘 중으로 상하이행 저녁 차를 탈 수도 있다. 먹은 것 없는 몸에 힘이 돈다. 226km. 하루 반을 달려왔다. 황포강의 시작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도착한 곳은 황푸강디이피아오. 느낌이 어색하다. 정오의 햇살이 따뜻하고 아무도 없는 주변은 고요하다. 바람만 가끔 옅게 불고 놀란 물새가 두어 마리 수면을 친다. 근원이라는 단어가 갖는 신비감의 정체는 여기에 무엇도 없다. 어찌된 일일까? 쇠락한 놀이동산 느낌이다. 입구 매표소는 겨우 문 닫았고 주차장은 비었다. 주변 몇 곳의 식당도 겨우 문만 열어두고 있다. 정말 여기인가? 안내문에는 이 곳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가량 내려 간다고 쓰여 있고 뱃삯 80원이라고 적혀 있다. 아, 뱃놀이 하는 곳이었나? 배들은 모두 뭍으로 끌어올려져서 비닐 장막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 있었을 때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에 간 적이 있었다. 낙동강은 태백시의 한 가운데 있는 황지연못에서 발원하고 한강은 그 곳에서 10km쯤 떨어진 산 속 검룡소에서 발원한다. 맑고 차가운 물이 땅 속에서 솟아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10년쯤 지난 그 장면을 꼭 같이 기대하며 온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발원지의 기억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여기까지 오는 내내 그 장면이 머리에 남았다. 여기는 아닌 모양이다. 썩어 고인 물의 위쪽은 여전히 흐르고 있어서, 저 위 어디에서 이 강의 이름은 출발하고 있노라고 말한다. 아마 들었던 대로 롱왕산 어디쯤에서 물은 솟아나고 있을 것이다. 됐다. 탐사가가 될 생각은 없다. 이번 여행은 여기까지다.

여행의 끝을 다짐했지만 아쉬운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이것이었나 싶은 마음을 다독여야겠다. 옆 식당에 들어가 별 기대도 없이 묻는다.
“여기가 정말 황포강의 시작인가요?”
“아, 거기? 여기서 저 길 따라서 40km쯤 더 가야 해요.”
“40km요? 음, 거긴 확실히 표지판이 있긴 한가요?”

역시나 여긴 아니었구나. 그리고 역시나 분명히 다른 곳에 있었구나. 아직 먼 목적지와 따듯한 집 사이를 방황하던 자전거는 다시 마을 길로 접어든다. 이미 한참 전에 성도에서 빠져 나온 덕분에 작은 길은 중앙선도 없고 자잘한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한다. 이 길을 따라 40km를 가야 한다. 이미 오후도 한참이다. 산 속의 해가 빨리 지는 것을 감안하면 또 부지런히 달려야 한다. 안지현은 대나무 가공공업이 활발한 도시인 모양이다. 곳곳에 대나무를 재료로 하는 가구공장이 있고 온통 대나무로 가득 찬 산들이 겹쳐 있다.

마침내 보이는 진짜 발원지 이정표들. 산 아래 온 것을 알리듯 완만하지만 끝 없는 오르막이 이어진다. 목적지까지 25km. 순도 높은 25km짜리 오르막을 준비했다는 뜻. 아마 그럴 것이라고 알면서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고 일말의 기대를 가졌지만 결국 눈 앞에 나타나버린 급격한 언덕이다.




오후 네 시. 마지막 계곡을 지나서 입구에 도착했다. 상하이에서 266km 떨어진 곳이다. 아래 민박집에서는 30분이 걸린다고 했으니 입구를 지나면 곧장일 것이다. 이 풍성한 물이 솟아나는 장면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지만, 발원지라고 했으니 아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원지는 계곡 속에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없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둘 곳이 안 보인다. 이미 날이 늦었으니 아래 민박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걸어서 발원지를 보러 가기로 한다. 이 작은 결정이 가져올 사태를 이 때는 몰랐다.
비수기여서일까? 계곡 곳곳에 있는 민박집들은 손님이 없다. 방을 잡고 자전거를 방 안에 옮긴 다음 민박집 식구들과 함께 놀고 그들의 식탁에 숟가락 하나만 얹어서 함께 저녁을 먹는다. 내일이면, 강의 시작을 본다.

누적 주행거리 247km


3일차

가난한 여행자는 입장료를 피하기 위해 새벽 길에 나선다. 휴대용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까만 산길을 1km쯤 걸으면 입구가 나오고 그 곳에서부터 이정표를 따라가면 황푸강의 발원지에 닿을 수 있다. 30분이면 된다고 했다. 분명히. 30분 걸으니까 작은 폭포가 보인다. 작은 크기에 비해 내리쏟는 물줄기는 제법 거세다. 잠시 감상하고 사진 찍고 다시 상류로 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바로 아래까지 보이던 ‘황푸강위엔토우黄浦江源头’라는 표지판이 안 보인다. 어찌된 것일까? 뭐 상관 없다. 물은 아직도 거세게 흘러내려 오고 있으니 저 위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샘솟는 물의 근원 말이다.

1시간쯤 걸었을까? 관광객을 배려하던 길은 이미 사라졌다. 이건 분명한 등산로다. 오로지 등산객을 위한 길이다. 그래도 아직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는 거세다. 더 가 보자. 1시간 30분, 2시간. 이 길이 맞는 것일까? 이러다가 산 꼭대기 가지 않을까? 단지 옆에 흐르는 물소리에 의지하며 저 흘러내려오는 물 끝에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간다. 물줄기는 상류가 가면서 몇 줄기로 갈라졌다. 등산로는 어떤 물줄기를 포기하면서, 어떤 물줄기와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산 정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캔 죽 하나 겨우 먹고 물병도 없이 아무 장비도 없이 나선 길이 점점 막막해진다. 허기는 이미 경계를 넘었다. 중간 중간 계곡 물 몇 모금으로 달래보아도 소용이 없다. 갈 길은 여전히 멀어 보인다. 이건 뭔가 잘 못 됐다. 1567m 산 정상이 눈 앞에 있다. 더 가다간 쓰러진다. 물 소리는 이제 한 곳에서 들리지 않고 사방으로 갈라져서 내려온다. 여기까지다. 내려 가자. 30분이면 된다던 길을 세 시간 가까이 올라왔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길이다. 허기진 몸으로 구르듯 내려가서 마지막 표지판을 보았던 곳에 선다. 다시 보이는 작은 폭포. 아,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글씨. 황푸강위엔黄浦江源! 황푸강의 발원지라는 표지는 실재하는 한 점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지였다. 물이 흘러내려오고 있으니 당연히 저 위 어디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던 불찰이다.





저기였었나? 입장료 아끼겠다고 너무 어두운 새벽에 왔다. 그래서 미처 글씨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등산의 무모함이란. 모든 강이 샘에서 발원한다는 작은 생각이 나를 산 속 어딘가 있지도 않는 샘으로 몰았다. 황푸강은 산의 온몸에서 발원하고 있다. 올라가면서 이미 수 많은 물줄기를 확인하고도 믿지 못 했던 어리석음을 탓해보지만 이미 시간은 흘렀고 몸은 지쳤다. 발원지를 확인하고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떠나려는 계획도 이미 늦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강은 한 점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구나. 롱왕산의 여기저기가 강의 발원이고 태호와 디엔산호가 모두 황푸강의 발원인 것을 이제 알겠다.




이제 자전거를 타고 안지현으로 돌아가서 상하이로 가는 버스를 타면 여행은 끝난다. 항주로 가서 기차를 타려던 계획은 새벽 등산 때문에 수정해야 했다. 안지현까지 50여km를 달려 간다. 자전거를 분해해서 미리 가져온 전용가방에 넣고 상하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가져온 질문도 모호했고 얻은 답은 더욱 모호하다. 남은 질문은 다음 여행 때 다시 물어야겠다. 얼른 집으로 가서 따뜻한 밥 한 공기에 잘 익은 김치를 얹어 먹어야겠다.

황푸강을 보고 나니 괜히 장강의 시작이 궁금해진다. 아, 장강은 6300km라던데……

총 주행거리 311km



2009년 2월 16일 월요일

알고 지냈던, 그런데 오래 지나서 이제 잊었던 사람이 몇 년만에 메일을 보내왔다. 그 친구는 나를 섬.이라고 불렀다. 섬이라... 그 친구 말에 따르면 나와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것이 2002년 정도였다고 하니까, 아마 그 무렵에 나는 섬.이었던 모양이다. 인터넷 이전, 모뎀으로 통신하던 시절에 내 닉네임이었다. 그것도 잊었던 이름이다. 제법 좋은 이름을 썼었구나. 어쩌면 반군.이라는 지금 닉네임보다 낫구나.

섬을 떠나 산 것이 오래 되었다. 한국 갈 때마다 들르는 내 고향 섬은 여전히 포근하지만, 이제 상하이 이 땅이 한국의 어느 도시보다 익숙하고 편하게 되었다. 슬프고 대견하다. 한 통의 이력서를 떠올리게 하는 메일 속에서,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도 졸업했단다.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내가 지나온 시간이 나름 긴 시간이었구나.

욕심나는 출판사 한 곳에 책 원고를 보냈다. 미경 누나의 충고대로 다는 안 보내고 세 꼭지만 보냈다. 한국 상황이 워낙 안 좋다니까, 게다가 나는 서투르고 내 원고는 성그니까 좋은 답이 올 가능성은 제법 낮을 것이다. 그래도 기대는 내 몫이지 않나. 기다려 보고,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되면, 그 때까지도 답이 없으면 출판사에 대한 욕심은 접어야겠다. 내 원고에 관심을 보여주는 곳이면 그냥 떠다 맡겨야겠다. 첫 책은 좀 서투를 모양이다.

손지연.이라는 가수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들었다. 뒤져보니 3집까지 나왔는데, 1,2집은 품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노래 부를 때는 아마도 술 몇 잔 걸치고 반쯤 몽롱한 상태에서 부르는 모양인데, 어쨌든 노래는 좋다. 한국 갈 때까지 기다리기는 멀고, 연락해서 부탁해 보아야겠다. 한국에 있을 때 전영숙 선생님 댁에 가끔 갔었는데, 선생님 댁은 언제나 이틀 코스였다. 그 곳에는 지하 서재가 있거나 옥탑방 서재가 있었다. 저녁쯤에 가면 밤새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음악을 듣다가 새벽에 잠든다. 아침이면 꼬마들이 와서 깨우고, 그러면 식탁에 앉아서 선생님께서 끓여주시는 아침 해장국을 그 집 식구들과 함께 먹는 것이다. 중국 사상(아마 도가풍)을 온몸으로 구현하시던 선생님. 밤이 늦고 술이 거나해지고 이야기도 대충 떨어질 때쯤이면 선생님은 뒤적뒤적하면서 음악을 골라 틀어주셨는데, 그 시간쯤에 듣는 것이라곤 김광석이나 장사익, 한영애, 한대수, 황병기, 오연실 같은 것들이다. 요즘 어디 가서 이런 음악 이야기는 잘 안 한다. 좋아한다는 말도 안 한다. 괜히 엉뚱한 소리 듣기 좋고 분위기 깨기 좋다. 나도 그 정도 분위기는 맞출 줄 안다. 한국에서야 그나마 끼리끼리 모일 수 있었으니 함께 들었다지만, 여기는 잘 없다. 그냥 혼자서 듣고 만다. 그럴 때 가끔 한국이 그립고, 선생님 댁이 그립고, 같이 책장에 등 기대고 앉아서 진심으로 낡고 느리고 서러운 음악에 취하던 사람들이 그립다.

언젠가는 섬에 돌아갈 테다. 오래 걸리겠지만, 아직 무엇도 가지고 돌아갈 것이 없지만 나중에 나중에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소박한 비단옷이라도 입고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섬으로 돌아가야겠다. 가서 소리소리 노래 부르고 살 테다.

섬. 참 좋은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