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8일 일요일

연말인사



군대 제대 후 처음 디카를 사고, 심심해서 시작한 연말 인사가 이제 일곱 해 되었다. 해마다 들어간 내 사진들 보면 내가 변한 것을 알기도 하고, 또 내가 여전한 것을 알기도 한다. 한 명 한 명에게 보낼 생각을 하며 한 명마다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한 명도,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한국 #2

1.
중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서울 동생집에 머물렀다. 시험기간이라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동생이 와서 깨웠다. 새벽 세 시가 지나 있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병원 계신 모습을 보고 올라온 지 이틀 만이다. 면도하고 옷 차려입고 나왔다. 새벽에 바깥 바람은 찼다.


2.
외할아버지 핏줄은 어머니 밖에 없다. 외할머니는 어머니 어려서 벌써 돌아가셨고, 어린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도 얼마 못 자라 죽었다고 했다. 아침에 도착한 영안실에, 어머니는 앉아서 울고 계셨고 아버지는 독경하고 계셨다. 동생과 함께 절하고 나오니 아버지께서 울고 계셨다. 고집스런 외할아버지께 가끔 삐뚠 소리 하신 것이 가슴을 친다고 하셨다. 무남독녀인 어머니를 도와 아버지도 상주가 되셨다.
철 들고 처음 상복을 입었다. 나는 백관이 되었다. 상복. 그 얇은 옷 한 겹이 무겁다. 피의 무게다. 나를 이 땅에 보내고 또 내가 이 땅에서 이어가야 할 무게를 실감한다. 상복. 새 옷 냄새가 난다.


3.
내 기억의 시작에서부터 외할아버지의 한 쪽 다리는 불편했다. 내 기억의 시작에서부터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였으므로, 나는 할아버지의 불편한 다리가 할아버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열 살쯤 되었을 때, 논두렁에서 떨어져 구해주는 사람 없이 몇 시간을 찬 논두렁에 방치되었던 할아버지는 그 뒤로 여든 생 동안 반신을 불편하게 쓰셨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외증조할머니와 함께 사셨다. 외증조할머니는 내가 겨우 기억이나 할 무렵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혼자 사셨다. 차근차근 외할아버지의 삶을 되짚어 보면, 그 한의 크기를 재려다가 지쳐 넘어진다.
영정 사진 속에서 할아버지는 깔끔하게 걷어 올린 머리 스타일이다. 살짝 보이는 흰머리카락도 균형이 좋다. 왼쪽 어깨를 높이고, 굳게 다문 입. 체크 무늬 모직 넥타이와 스트라이프 재킷. 메인 조명이 왼쪽 위에서 내려 오고 반대편 조명이 부족한 밝기를 채우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할아버지께서 이 사진을 찍으시러 가던 날을 기억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절뚝거리시며 한참을 걸어서 드물게 오는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가 이발하시고 면도하시고 옅은 갈색이 퍼져나가는 배경지 앞에 앉으셨을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할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지으신 것일까. 기어이 살아낸 일생을 통째 밟고야 말겠다는, 나는 결코 생에게 패하지 않겠다는 각오 같은 것일까. 힘이 다해 갈 때, 저 사진 한 장으로 할아버지는 든든할 수 있으셨을까?


4.
시작부터 끝까지, 어머니는 서럽게 우셨다. 살아오는 동안의 한의 무게만큼 울음은 무겁고 깊었다. 곡소리는 어떤 해방. 같았다. 쌓이고 쌓여서 그 개개의 형태가 뭉개져버린, 인간의 말이 되지 못한 온갖 부정의 감정들이 비로소 풀려나는 소리 같았다. 밖으로 울어야 할 마지막 핑계가 되어주었던 혈육을 보내고, 이제 남은 삶 동안 어머니는 속으로 우실 모양이다.


5.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문상 오셨다. 노구를 이끌고 와서 두 번 큰 절하고 작게 한 번 절 했다. 늙은 몸은 엎드리기 위해 엎드린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고,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굽혀지지 않는 노구를 무릎 꿇고 엎드리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발인 날 새벽에 꺼지는 향을 갈아가며, 부조함에 들어온 봉투들을 꺼내 정리했다. 노트를 펴서 봉투에 적힌 이름을 옮겨 적고, 봉투 안에 든 만원 짜리를 세어서 이름 옆 칸에 적었다. 날 밝아서 발인 전에는 영안실 원무실에 가서 장례 기간 동안 사람들이 먹은 음식이며 온갖 비용을 정리했다. 카드 하나로는 한도를 초과해서, 어머니와 아버지 카드를 모두 받아 썼다.


6.
갓 태어난 아이들을 보고 돌아선 며칠만에 보는 죽음은 비현실적이었다. 아직 태지도 벗지 못한 피부와 검버섯 핀 피부는 아무래도 닮지 않았다. 이것이 변해 저렇게 될 것이라고, 배우지 않았다면 믿지 못 할 뻔했다. 저 피부가 이 피부가 될 때까지, 저 피부는 어떻게 되어갈까?
장례 기간 내내 카메라는 쭈뼛거렸다. 내 카메라는 아내의 죽음 앞에 춤 추었다는 장자가 되지는 못 할 것이다. 그 사체 앞에서 조리개를 조여나간 아라키도 못 될 것이다. 내 카메라는 참 작아야할 모양이다.



할아버지.
이제, 되었네요.

한국 #1




어려서 누나는 아팠다. 멀리뛰기하다가 다쳐서 두어 달 아버지 등에 업혀 학교 다녔다. 그리고 사방으로 찾아다니며 치료 받아서 겨우 낳았다. 아픈 동안 다시는 누나가 누나의 두 다리로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갑자기 다쳤던 것처럼 갑자기 낳았을 때 부모님은 우셨다.

다 자라서 누나는 아팠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했다. 큰 수술을 하고 매형이 병수발을 했다. 완치 판정을 받고 매형이 우셨는지, 또 부모님이 우셨는지 나는 모른다.

건강한 쌍둥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나는 백화점 1층 걷는 중에 들었다. 마음 졸였었는데, 마음 쓸까봐 심한 당부도 못 하고 그저 속으로 빌고 기다렸는데, 출산 후 기운 빠졌지만 건강한 누나 목소리를 듣고 백화점 1층에서 나는 울었다.

얼른 와서 조카들 사진 찍으라는 무언의 압박.

아이들은 흐리고 낮은 하늘의 세상과 첫 대면했다. 저 작은 것이 사람이다. 조리원에서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내게 안긴 아이는 초점 잡기 힘든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존재의 가치를 고민하고 있는 것일 테다. 아직 익히지 못한 사람의 언어 대신, 전할 수 없는 언어로 어쨌든 무거운 고민을 시작한 것이다. 누나는 웃었다.

내년 한국에 갈 때는 예쁜 아기 신발 두 켤레를 사야겠다.

블로그를 만들다

기존 웹사이트를 사진 중심으로 개편하고, 보다 상업적인 포트폴리오 사이트로 만들기 위해 쪽글과 안부 게시판을 분리하려는 목적.

블로그.라는 형식은 낯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