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7일 금요일

엄마가 섬그늘에
乍浦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한가로운 어촌 풍경이 그려지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낮은 돌담장이 바닷가를 향해 열린 작은 집, 나무판을 끼워 만든 마룻바닥에 곱게 누운 아기를 상상한다. 그 아기에게 불어오는 바닷가 봄바람 같은 풍경들.
어촌이라는 단어를 바닷가와 동일시할 수 없는 시대에 산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의 해안선은 컨테이너 부두가 들어섰고 콘크리트로 말끔하게 마감한 부둣가에 육중한 화물선들이 정박했다. 도시의 바다에는 ‘漁’도 없고 ‘村’도 없다. 가끔, 바다의 너른 품이 아쉬울 때가 있다. 끝 간 데 없는 그 풍경 앞에서 딱히 무엇을 보겠다거나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이 없어도, 마냥 그 앞에 서고 싶은 때가 있기는 하다. 상하이 남쪽 어느 바닷가로 가면 그 곳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있고 그물도 있고 또 생선 비린내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자전거는 어촌으로 간다.
아침 지하철에 실려 송장까지 간 자전거는 곧장 남쪽으로 가서 황포강을 건넌다. 지도 상에는 강을 경계로 도로가 끊겨있다. 막연하게 떠오르는 단어, ‘설마’. 도로는 강을 건너지 못 한 듯하지만 그래도 강의 양편 도로가 같은 이름으로 닿아 있으니 어쩌면 작은 다리라도 있지 않을까? 하다 못해 강 건너는 배라도 있지 않을까? 설마 없겠어? 내 자전거 말고도 제법 많은 탈 것들이 저 길의 끝으로 가는 듯한데, 설마 그 탈것들이 막다른 길을 향해 가는 거겠어? 설마 강변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이야 생기겠어? 설마? 근거 없는 막연한 믿음에 기대어 자전거는 계속 가 보지만, 마음 한 구석 불안함을 속일 수는 없다. 마침내 도착한 강변, 아, 작은 부두가 보이고 익히 보던 입구가 보인다. 다행이다.





표를 끊고 배 타러 가는 길에 부두 콘크리트 위에서 버둥거리는 자라를 보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한낮의 콘크리트 위에 검은 몸으로 뒤척이고 있다. 곧 떠날 배를 앞에 둔 급한 마음은 얼른 집어서 강에 놓아주고 배에 올랐다. 배가 강의 가운데로 나아갈 때 돌아보니 다른 누군가 다시 자라를 집어서 물가에 놓아주고 있다. 다시 뭍으로 올라왔던 모양이다. 햇빛 내리는 그 바닥에서 검은 몸으로 빛 받고 있으면 온 몸이 끓어오를 텐데, 자라는 왜 그 뜨거운 바닥으로 다시 온 것일까?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전날 밤 기막힌 꿈이라도 꾼 것일까? 몇 번이나 놓여날 수 있을지 그 운이라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강을 건넌 자전거 앞으로 초록과 노란색의 바다가 펼친다. 밀인지 보리인지 알 길 없는 녹색 풀밭과 유채꽃의 밝은 노랑이 겹쳐져서 끝 간 데를 모르겠다. 초록의 냄새는 싱그럽고 노랑의 유채꽃은 여름의 풀비린내를 예비하는 알몸의 살냄새를 낮게 뿌려대고 있다.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자전거는 풀밭 가운데로 난 작은 흙길에 멈추어 선다. 혼자 헤매기 아까운 길이다. 데려와 함께 보고 싶은 사람들 얼굴이 봄풍경 위에 겹친다. 이 풍경을 혼자 독차지한다는 생각이 마냥 미안해진다.

송장에서 느릿느릿 다섯 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닿았다. 발전소 지나서 한국 민박집에 숙소를 잡고 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바다를 보러 나간다. 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 들러 다음날 아침 상하이로 돌아갈 버스표를 끊었다. 상하이 남역까지는 한 시간 반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바다의 등장은 갑작스러웠다. 멀리에서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바다가 아니고, 공원의 끝에서 불쑥 솟아오른 듯 검은 갯벌의 바다가 펼쳐진다. 눈은 검은 빛깔의 진흙을 한참 동안 밟아간 다음에야 멀리 거대한 물을 본다. 그리고 갑자기 불려 나오는 자라의 기억. 자라가 햇빛에 끓어오르는 제 몸을 부여잡고 기어 기어서 마침내 닿으려고 했던 곳이 여기는 아니었을까? 자라는, 길의 어디쯤에 있을까?





작은 만을 돌아서 골목길을 더듬어 가면 마침내 고깃배들이 묶여있고 생선 비린내가 펼친 어촌이다. 아침부터 달려온 자전거는 선창가에 눕고 더 나아갈 수 없는 여행자도 바닷가 바위 위에 앉아 지는 해를 본다. 굵은 밧줄에 감기고 검은 진흙에 붙들린 배들은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 하고 영영 여기에 묶일 듯하다. 해가 지고 바닷물이 들어오면, 내가 보지 못 하는 밤 어느 시간에 배는 출항할 것이다. 고깃배와 그 배에 올라탄 선원들은 같은 곳으로 갈 것인데, 선원은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고 배는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뭍으로 돌아오기 위해 가고 배는 바다로 가기 위해 정박하는 듯하다.

여행이 주는 위로는 계통 없는 것이다. 길의 풍경 앞에 서고서야 비로소 내 어느 한 구석에 위로를 받아줄 틈이 있었다고 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내 안에 풍경의 위로를 받을 틈이 있었던 것일까? 바닷가에 부는 오후 바람은 편안하고 위로 받는 마음도 더불어 고요하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배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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