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3일 목요일

유난히 시계視界가 좋은 날이 있다. 오후 늦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오늘 저녁이 그렇다. 창 밖은 마침 어두워지는 중이었는데, 아주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작은 베란다를 실내로 끌어들여 놓은 내 방의 창문은 서쪽을 향해 둥글게 나있는데, 서쪽으로는 아파트 단지와 그 너머 낮은 건물들의 꼭대기가 이어져서 지상과 하늘의 경계를 만든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멀리 중산공원에 있는 롱즈멍 호텔의 야간조명이 보인다. 이렇게 시계가 좋은 날은 한 달에 잘 해야 한 번 정도 밖에 없다. 이런 날은 건물의 외관을 찍기에 좋은 날이다. 뿌연 날씨에 찍고 이 만하면 됐다고 자위하며 돌아선 건물들이 미련처럼 남아서 떠오른다. 마침 대기는 건조하고 하늘은 흐리고 낮아서 내가 좋아하는 날씨가 되었다. 이 날씨에 바람까지 세차게 불었다면, 그래서 저 하늘 너머에서 곧 태풍이라도 올 것 같은 날씨였다면 내 마음은 미리 날았겠다.

퇴고를 시작한 원고는 진도가 잘 안 나간다. 문장을 마련하지 못 한 기억을 내용만으로 엮으려니까 그렇다. 내 글쓰기에 대해 생각할 때, 내 문장은 빠질 것이 없지만 내 기억력은 선택과 생략에 능하다. 그래서 닥친 상황에 대한 문장은 참 좋은 것을 알겠는데, 지나간 일에 대해 기억해 쓰려고 하면 문장은 맛도 안 나고 꼭 필요한 요점 외에 주변 상황들의 많은 부분을 생략해 버려서 쓰고 돌아본 문장은 문장이라고 부르기 부끄럽다. 내 다음 책은 아마 길에서 쓰게 될 것이다. 기억이 지나간 일들을 선택하고 선택받지 못한 이야기들을 지워버리기 전에, 싱싱한 비린내 나는 문장들을 묶어 내는 책이 될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월드비전에 후원신청을 한 것이 한 달 가까웠는데, 오늘에야 이메일을 통해 내가 후원할 아이에 관한 내용을 받았다. 아마 신청할 때 쓴 한국 주소로 우편물로 발송되었던 모양이다. 이메일을 통해 정보를 받겠다는 문의 메일을 보내니 이제야 보내준다. 내가 도울 아이는 말리.에 사는 토고.라는 이름을 가진 일곱 살 남자 아이다. 말리가 어디에 있는 곳인지. 피부색이 검고, 눈이 크다. 사진 좀 잘 찍지 그랬나. 흙벽 앞에 세우고서, "자, 사진 찍자. 예쁘게 찍어야 사람들이 널 도와줄 거야. 말 잘 들어야지."하며 카메라가 폭력을 휘두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아이는 겁에 질려서, 팔려나가는 짐승의 눈빛으로, 자신이 받는 도움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도 모르는 표정으로 사진 속에 있다. 때묻은 푸른색 티셔츠를 입었다. 축구를 좋아한다고 쓰여 있고, 남자 형제 네 명에 보통의 건강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름보다 윗줄에 아동 번호.라는 제목으로 이 아이는 몇 개의 숫자로 그 존재를 대신하고 있다.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얼마의 돈이 네 삶을 구하지는 못 할 듯한데. 내가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고 해야 네가 그 뜻을 받아들이기도 아직 어린데. 힘 앞에 주눅 든 네 표정 앞에 나는 주눅 든다. 어쨌든, 한 아이의 눈빛 덕분에 나는 열심히 제대로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서로 돕고 살자. 나도 힘이 들 때는, 버텨야 할 이유를 생각하마. 부족한 내가 기꺼이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않으마. 나라도 세상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는 의지가 되니 그래도 사는 것이 낫다고 믿으마.

유난히 정신이 맑은 밤이 있다. 오후 늦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오늘 밤이 그렇다. 어제 늦게 잠든 덕분에 아침에는 늦잠을 잤고, 덕분에 요 며칠 새벽마다 하던 원고 퇴고를 오늘은 못 했다. 한 번 엉킨 일과는 계속 이어졌는데, 마침 별다른 일정도 할 일도 없었던 하루는 무료하게 갔다. 인터넷으로 영화도 보고 한국 쇼도 보면서 밝은 날을 보냈다. 며칠 분주하고 단단하게 살았던 뿌듯함으로 오늘 하루의 나태함 정도는 덮어도 좋은 것이라고 스스로 다독인다. 이렇게 정신이 맑으니까, 오늘은 편지라도 써야 하나. 어제 혜림이가 보내준 히긴즈 트리오라는 재즈밴드의 음악을 씨디로 구워놓고 아직 듣지 않았는데, 아랫집 윗집에게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다 늦은 밤에라도 들어 보아야겠다. 부탁받은 승우 형 렌즈도 얼른 팔아줘야겠고, 허락의 전화를 해 준 승민씨 강의도 짜 보아야겠다.

조금 더 경쾌하게, 리듬을 타며 걷자. 다시 못 올 봄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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