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종일 비가 왔다. 머무르는 비가 아니라 한 번 쏟아지고 말 비라서 종일 제법 세차게 왔다. 일기예보에는 오늘도 비가 온다고 했는데 새벽 나절에 비는 그친다. 하늘은 여전히 낮고 흐린데 빠르게 흐르고 바람도 세차게 부는 걸 보니 비는 더 안 올 모양이다. 그냥, 느낌이다. 바람이 좋아서, 외장하드에 들어있던 음악 꺼내서 듣는다. 컴퓨터로 음악을 들으면 포토샵 속도가 느려지고 또 따로 엠프도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서 최근에 컴퓨터로 음악 듣는 일은 잘 없다. 대학교 입학하고 부터 조금씩 긁어모아둔 음악이니 제법 십 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음악들이다. 내 또래도 안 듣는 옛노래들부터 최신 유행곡 월 별로 모아둔 것까지 제법 있다. 역시, 음악 들으며 글을 적으면 도대체 방향을 잡을 수가 없구나.
음악여행 라라라. 무슨 개그도 아닌 것이 음악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 요즘에 꼬박꼬박 챙겨 본다. 손지연.이라는 가수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알았고, 적우의 얼굴도 여기에서 처음 봤다. 강호동의 무릎팍도사. 이후로 기존 프로그램들이 개그쇼의 형식을 도입하는 듯한데, 어색할 것 같던 장면은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인 듯하고, 가수를 불러놓고 노래 두어 곡 듣고 어색한 말 몇 마디 웃긴 척 하고 다시 노래 듣는 이 프로그램도 그 연장선에 있다. 진행방식은 그만그만한데, 불러세우는 가수들이 좋아서 그만하면 됐다 싶다.
이제는 떠나온 지 제법 된 내 작업실에는 낡고 큰 스피커가 네 귀퉁이에 있었다. 스피커보다 더 낡은 엠프도 있었다. 나보다 앞서 있었던 것들이다. 사람 귀가 간사하다는 것을 작업실에서 알았다. 그 낡은 것들에서 나와 나무 바닥을 울리며 내 귀에 닿던 소리는 컴퓨터 스피커의 그것과 비교도 안 되는 풍성함이었다. 2년 가까운 작업실 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컴퓨터 스피커 소리는 귀가 아파서 얼마 들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미친 척 앰프를 샀다. 지름신의 가르침이 언제나 그렇듯, 처음에는 그저 저럼한 걸로 구색만 맞추면 되지 했던 것이 알아보는 사이에 점점 높아지고 높아져서 밥값 방값 걱정하던 그 때에 덜컥 분에 과한 앰프를 들였다. 내 집 거실의 절반을 차지하고 앉은 앰프와 스피커, 그리고 몇 장의 씨디들.
음악은 그저 작업하는 동안, 딴짓하는 동안 배경처럼 흐르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앰프 사고 스피커 사고 씨디도 몇 장 사면서 알게 된 것은, 음악은 그냥 음악만 듣는 거다. 진공관을 예열시키고, 음악을 고르고, 따뜻한 물 한 잔 따라 와서 적당한 거리에 자리 잡고 앉아서 음악 들으면, 좁은 거실에서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아, 음악은 행복한 것이구나,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음악에 대한 내 이해가 사진이나 문학에 대한 수준만큼 되었더라면 나는 하루 종일 음악을 듣고 살았을 테지만, 아직 얕고 얕아서 도대체 모를 음악이 많다.
어떤 날은 문득 깨닫는 날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깨닫기도 하고 저녁 잠자리에 누워서 불끄고 깨닫기도 한다. 무엇을 깨달은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아, 내가 자랐구나 싶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껍질의 한 쪽이 깨어져 나가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흐리고 대지는 젖어 있고 바람이 세게 부는 날, 나는 조금씩 자라는 나를 느낀다. 아름다운 봄날의 흐린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메일 열었는데 호텔 촬영 의뢰가 왔다. 포트폴리오와 견적을 보내고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눈치를 살펴야 하니까 의뢰가 촬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도, 하나 둘 오는 연락이 반갑다. 이번엔, 티엔진이다.
새벽 맑은 정신에 적어두는 이런 주정같은 메모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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