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15일 일요일

장 그르니예, 섬

장 그르니예, 섬

얇고 낡은 책이다. 종이는 바래서 누렇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함유선의 번역으로 1992년에 발행된 10쇄판이다. 조금 큰 수첩 크기의 책에는 사방 여백이 많고 글자들은 가운데 모여 있다. 글자들은 가장자리로부터 점점 바래가는 종이의 여전히 흰 부분으로 도망쳐 모여든 것 같아서 겨울 강에서 다리 아래 아직 얼지 않은 물로 모여서 추운 한 계절을 나는 고기떼를 닮았다.
제대할 때 부대에 있던 책 중에 몇 권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 중에 한 권이다. 지금도 책 앞에는 분류번호가 붙어 있다. 아끼는 책 중에 한 권이다. 아낀다기 보다는 든든한 책이고 든든하기 보다는 귀한 책이다. 가벼운 듯 깊은 사색의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시니 소설이니 하는 문장의 구분은 부질 없어 보인다. 언제나 까뮈의 이름을 업고 소개되는 장 그르니예는 까뮈의 문학적 스승이라고 알려져 있다. 까뮈의 문학적 성취 덕분에 더불어 알려질 수 있었으니까 장 그르니예는 까뮈에게 고마워할까? 아니면 언제나 까뮈라는 이름에 빌붙어 등장하며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 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할까?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화난 감정은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다. 책에는 물루.라는 고양이 이야기가 한참 동안 나오는데, 지극정성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고양이가 어느 날 나가서 심하게 다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사를 해야 할 상황에 닥치고, 결국 고양이를 안락사 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렇게 사랑한다던 고양이를 결국 안락사 시킨다는 결정은 위선이었고 기르던 동물의 삶을 마음대로 끊어낸다는 것은 인류라는 종족이 가진 오만이었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시간은 흘렀다. 몇 년이나 흘렀다. 물루는 여전히 안락사 당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분노하지 못 하겠다. 그 안락사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여전히 못 할 짓이지만, 다만 작가의 생각을 긍정해 주기로 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을 알겠다.

책 퇴고 방향을 정했다. ‘상하이에 가 본 적 있습니까?’라는 가제를 가졌던, 이 도시에 대한 오로지 깊기만 한 열 두 꼭지의 문장으로 완성하겠다던 책은 여러 편집자와 출판사를 만족시키지 못 했다. 그러는 사이에 몇 달이 지났고, 예상했던 대로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원고의 부족한 부분들은 여름 풀처럼 자라서 이제는 사방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아, 이런 부족한 글을 묶어 책을 만들겠다고 했었구나. 그렇게 여기저기 보였었구나, 생각하니 부끄럽고 할 수 있다면 이미 나간 원고들을 모두 거두어 들이고 싶다. 책 속의 문장은 거칠고 서투르고 고집스러웠다. 그리고 괜히 힘 준 어깨마냥 높기만 했다. 책을 읽을 사람에 대한 고려도 없이 나는 그 사람의 책장만 생각했다. 어느 책장이든 내 책이 자리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다는 고집만 부렸다. 책은 ‘상하이, 7년의 여행’이라는 가제목으로 바꾼다. 한 명의 풋내기 졸업생이 어엿한 병아리 사진가가 되어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무대로서 상하이는 다른 곳과 구분되어 도드라지는 매력을 드러낼 것이다. 상하이에 왔던 초기의 자료들을 찾기 위해 예전에 홈페이지로 쓰던 사이트를 열었다. 좀처럼 보지 않는 곳이다. 아, 그 곳의 나는 서투르고 섬세하고 따뜻했다. 그 때의 연장선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지금의 나와 어떤 연관성도 없는 듯 했다. 언젠가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싶게 부러운 모습이었다. 조금 엉성하긴 했지만, 그 때 문장이 지금보다 어쩌면 나았구나 싶기도 했다. 어찌나 위트 있는 문장을 구사하셨던지.

모나님과 쥐루 누나가 동시에 사다 준 손지연의 음악을 오늘 아침에야 들었다. 앨범 갖고 싶다고 에프상하이 게시판에 칭얼거렸더니 한국 다녀오시는 모나님이랑 한국에서 잠시 여행 온 쥐루 누나가 동시에 사다 주었다. 그것도 절판 된 2집을 뺀 1,3 집만. 차마 말은 못 하고, 두 분께 고맙게 받았다. 아직 서로는 이 사실을 모른다. 영원히 모르시기를.
마음에 드는 음악을 제대로 듣기에는 너무 늦지 않은 저녁시간이 좋다. 일정 공간을 제대로 채워 좋은 소리를 내려면 좋은 앰프 좋은 스피커도 있어야겠지만 좋은 공간도 있어야 하고 또 공간에 알맞은 볼륨이 되어야 한다. 내 집 거실에서 듣기 좋게 음악을 들으면 아랫집 윗집 눈치를 살짝 보아야 한다. 내가 워낙 민폐 끼치는 걸 못 하는 성격이니까 따지고 보면 내 걱정만큼 두 집이 신경을 쓰진 않을 것 같다만, 게다가 중국이니까 옆집에서 고성방가를 해도 뭐라고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눈치 살피는 나의 소심함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고른 시간이란 게 대기가 가라앉은 저녁 시간, 그 중에서 남들 잠들기 전이어야 되니까 대충 저녁 7시부터 9시 정도가 된다. 씨디를 받은 후 좀처럼 이 시간대에 집에 있을 여유가 없어서 씨디는 탐스러운 먹거리처럼 책상 위에서 개봉을 기다렸다. 더 기다리기 싫어서 오늘은 부러 새벽에 일어나 미리 앰프를 예열시키고 다른 일거리 좀 마친 후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밤 시간만큼이야 못 하겠지만, 아, 좋구나. 원고 정리하면서 들으려다가 양쪽 다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냥 컴퓨터 밀어두고 음악만 들었다. 들으면서 슬쩍 이 음악을 어떻게 사진스터디에 써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김소월의 시와 비교해서 설명하면 되겠구나 싶어서 얼른 메모했다. 새로 시작한 스터디에는 제법 십 수 명이 참가하고, 배우려는 분들의 욕심도 대단해서 그 눈빛들과 마주치는 일은 즐겁다. 이번 스터디에서 나는 카메라 기초만 하기로 했는데, 그러니까 강평까지 넘어가면 사실은 월권이 되겠지만 그래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으니 해야겠다.



그만 쓰자. 잡담이다. 얼른 책이나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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