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13일 금요일

아, 파리넬리

작업해야 할 사진들 옆에 미뤄두고 새벽부터 영화 봤다.

얼마 전 혜림이가 살롱사진에 대해 물었다. 이제는 열등한 사진처럼 이야기되는 살롱사진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변호했다. 영화는 잘 찍은 한 장의 살롱사진을 보는 듯했다. 살롱사진은 사진이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아직 사진의 독자적 문법이 없을 때 회화를 추종하던 사진의 한 형태였다. 이후 다양한 사진가들에 의해 사진은 회화와 구분되는 사진만의 문법을 구축해 왔고 현대 사진에 이르면 사진은 더 이상 회화의 지위를 탐내지 않는다. 회화보다 현실에 가까이 들어간 사진은 예술의 지위 자체를 우습게 보기도 하고, 또 예술 사진은 회화와 다른 길을 통해 그 지위를 획득했다. 그래서 최신의 사진문법으로 무장하고 나름 치열하다는 자세로 사진을 하는 사람들에게 살롱사진은 우스워 보이고 이미 흘러간 과거의 유물처럼 받아들여진다. 잘 나가는 사진계에서 밀려난 사진은 역시나 시대에서 밀려난 이발소 벽에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걸리거나 어느 식당 달력 안에 담겨서 고기 씹는 맛을 돋군다.

새롭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시대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생각은 여기 저기 남은 듯해서, 작가들은 어떻게든 다른 작품과 다른 세계를 펼쳐내려고 한다. 그 의지가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다른 작가들과 어쩔 수 없이 다른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다면 좋겠지만, 때로는 주객이 자리를 옮겨서 오로지 새롭기를 목표로 얕은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부작용도 생긴다. 인체를 기형적으로 변형시킨 인물화의 범람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한 작가가 다리를 길게 늘린 회화를 그려서 이슈가 되면 다른 작가를 팔을 길게 그린다. 그러면 또 다른 작가는 눈을 크게 그려보고 제 3의 작가는 눈을 지워버린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해석이란 것들은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다.

경극배우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갔던 그들의 연습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무대 위의 일 분은 무대 아래서 십 년의 연습이다." 대충 기억하기에 이렇다. 그 때 나는 이 문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몰라서 물었고, 배우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 속에 담긴 뿌듯함이 남긴 인상이 아직 선명하다. 각각의 예술 장르는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형태를 개발해 왔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꾸만 빠르게 갈 것을 요구해서 지난 것들을 빨리 허물기를 주문한다. 시간이 쌓이며 만드는 무게감을 가볍게 본다. 좋은 살롱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그들이 들인 시간과 공력의 무게는 어줍잖은 아이디어 싸움이 함부로 낮추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롱사진이나 스트레이트 사진이나 순수예술 사진 모두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일 것이고, 그러니까 그 가치는 함께 존중받아야 한다. 서열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음악이 등장하고 화려한 색깔이 등장하고 귀족시대의 의상들이 등장하면서 듣고 보는 재미를 준다. 하지만 그 바탕은 이야기에 두고 있는 듯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구성하고 화려하게 포장함으로써 참 보기에 좋은 영화가 된 듯하다. 새로운 기교를 넣어서 부풀리려고 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게 만든 영화 같았다. 사진의 기본을 다시 생각해 본다. 아, 영화는 거세당한 남자 성악가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여배우의 가슴은 어찌나 탐스러우시던지.

이제 사진 만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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