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9일 일요일

흐린 일요일 오후

운동화처럼 신고 다니는, 비 맞은 구두에 약칠해서 그늘에 두었다. 대신 등산화끈 질끈 동여매고, 옷도 등산복 비슷하게 입고 쌀 사러 간다. 여행가는 기분으로. 마침 들고 나간 책도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 책 쓰는데 참고하라고 쥐루 누나가 보내준 책이다. 잘 나가는 소설가답게 작가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재주가 좋다. 소소한 사건들을 씨줄 날줄 엮듯이 이어서 구성을 탄탄하게 하고 문장들은 재기 발랄해서 참 재미있다. 재미만 있는 줄 알았는데, 김사량이 중국으로 간 길을 따라 가는 다큐멘터리 이야기쯤에 이르면 작가적 사색의 내공도 드러난다. 좋은 책이고 많이 참고가 될 책이다.

근처 시장으로 가서 우선 김치찌개에 들어갈 마늘과 양파를 하나씩 사고, 옥수수도 하나쯤 사려다가 별로 좋은 녀석이 안 보여서 관둔다. 입구로 돌아나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눈치보다가 어두운 계단으로 도망친다. 같이 안 놀아줄 모양이다. 비싸게 군다. 쌀집에서 그 중에 좋은 쌀 한 포대를 사서 어깨에 짊어지고 온다.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쌀 떨어진 지 일주일이 넘었고, 며칠 동안 내 아침은 삼양라면과 짜파게티를 번갈았다.

에프상하이에서 만난 오래된미래.님이 월드비전 참가를 압박하셨다. 기꺼운 마음으로 하겠다 하겠다 하다가 오늘에야 등록한다. 내가 보내는 많지 않은, 그러나 적지도 않은 돈으로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어느 땅의 아이가 밥을 먹고 자라겠구나. 밥만 먹지 않고 어쩌면 공부도 하며 자라겠구나 싶다. 굳이 해외 아동이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를 지독한 한국인으로 키워낸 한국의 민족주의 교육을 원망할 때가 있다고 답해야겠다. 나는 죽을 때까지 한국인으로 살겠지만, 내 다음 세대는 당당한 지구인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어줍잖은 영토의 경계를 나누고 그 경계 밖에 있는 것들을 향해 날 세우는 것을 당연하게 가르친 교육은 사기다. 네가 버티지 않으면 경계 밖의 것들이 와서 너를 해치고 네 주변의 것들을 모두 가져갈 것이라는 내부적 협박이다. 교육은 그렇게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을 나누고 바깥 것들을 미워하게 가르쳤다. 도울 수 있다면, 내가 인지하는 공간의 가장 낮은 곳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우주인이 되지 못 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해외 아동을 후원하는 일이 한 때 유행처럼 보인 적이 있다. 괜히 생각 없이 숟가락 하나 더하는 것 같아서 꺼리다가, 그런 유행이라면 얼마든지 해도 되겠다 싶어서 떠밀리는 마음으로 덜컥 신청했다. 자신에 대한 어떤 기대는 기꺼이 받아내기도 하고, 어떤 기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내기도 한다. 한 존재의 기대를 하나의 몸으로 받아내는 일은 무겁다. 집에서 풀 하나 키울 때도 그 풀이 제 온 생명을 내 보살핌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 이제 저 산 넘고 바다 건넌 어디에서, 한 아이가 내게 그 성장을 의탁하게 되었다. 아, 한 삶이 어떻게 다른 한 삶을 온전히 받아서 버티어 내나?

이 나이까지 자란 나를 보면 나는 참 많은 혜택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제대로 배울 기회도 평등하게 나눌 수 없었던 부모님 세대만 보아도 그렇다. 배움에 대한 앞선 세대의 갈증들. 당신을 입을 것 쓸 것 아껴가며 내게 주신 것들이 얼마였던지. 덕분에 나는 잘 자랐다. 빌어먹으실 국경 이라는 틀 때문에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도, 최소한의 기회는 있어야 한다. 그들의 삶을 그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간절하게, 그렇게 생각한다. 이미 있는 기회를 버리고 대충 살겠다는 것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기회조차 가져본 적 없는 아이들이나 기회를 자각하지 못 하는 청년들을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곳 유학생들에 대한 생각도 같은 선상에 있다. 그러니까 능력이 있는데도 대충 사는 것들이나 제 한 몸 살 찌우며 살겠다는 것들은, 좀 맞아야 한다. 어쨌든, 힘들게 지낸 몇 년을 지나 이제 이 정도 돈을 내 힘으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게 작은 일이 아니다. 이게 돌려주기.의 시작이 될 모양이다. 인터넷 뱅킹 클릭 몇 번으로 끝난 이 작은 선택이, 어쩌면 내 다음 삶의 방향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더듬이가 그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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