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30일 금요일

와젠느 앗제 (Jean Eugene Auguest Atget)

와젠느 앗제 (Jean Eugene Auguest Atget)
1856∼1927



어느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마 예술에 대한 쉬운 소개서였을 겁니다. 한 전시가 있었는데, 유명한 화가 한 명이 캔버스 전체를 붉은 색으로 칠한 작품을 내어 놓았답니다. 아무 것도 없고, 그냥 붉은 색이었답니다. 작가는 민족의 아픔을 표현했다며 오로지 붉은 색으로 채워진 작품의 의미를 설명했고, 그 작품은 나름대로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전시를 관람하던 관객의 질문이었습니다. 관객은 페인트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지요. 큐레이터를 향해 묻기를,
“나는 페인트 색을 테스트하기 위해 화면 전체를 한 가지 색으로 칠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린 것도 작품 아닙니까? 똑같은데요.”
큐레이터의 대답은 당연하고 단호하게 ‘아니다.’였겠지요. 예술에 대해 별다른 공부가 없는 사람도 이 대답에 동의할 겁니다. 조금 머뭇거리기는 하겠고, 또 긴가민가하겠지만요. 예술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가며 역시 이 대답을 당연시할 겁니다. 뭐 그 이유가 맞는지 알 길은 없겠지만요.
과거 예술이 기술의 숙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때, ‘예술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작업은 비교적 쉬웠습니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긴 시간 동안 기술을 수련해야 했습니다. 그 수련은 일정 수준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건축이 그랬고 회화가 그랬고 조각이 그랬고 또 음악이 그랬습니다. 아주 세밀한 부분을 제외하면 누구나 예술가의 작품이 잘 된 것인지 그렇지 못 한 것인지 알아챌 수 있었고, 또 그 감동의 크기를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예술은 그 관념을 하나씩 깨면서 옵니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때는 뒤상이 변기 하나를 들고 나타난 때였습니다. 이 변기는,
“예술가의 예술적 아이디어가 곧 예술이다.”는 뒤상의 선언문이었습니다. 예술적 아이디어 역시 분명한 수련과 학습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 결과물은 예전처럼 쉽게 파악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작품은 작가의 배경을 함께 파악해야 비로소 읽을 수 있게 되는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작가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작품 앞에 서는 것만으로는 도대체 모를 혼란 속에 서기 쉽습니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곧 작가의 의식세계에 대한 평가로 이어집니다. 그 기술적 테크닉에 대한 찬사는 이제 첫 번째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앗제의 이야기를 합시다. 지루한 이야기를 덧붙인 것은 앗제의 사진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논쟁중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의 발명 이후 사진은 기술적 발전과 동시에 예술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밖으로 보기에 사진과 가장 닮은 기존의 예술장르는 회화였고, 사진은 이 회화를 복제함으로써 회화가 가지고 있는 예술의 지위를 공유하고, 사진가는 화가와 동격의 지위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앞서 썼듯이 그런 시도는 보들레르를 비롯한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들었고요. 좀 더 회화처럼 보이기 위해 회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을 연출하고, 일부러 초점을 흐리게 촬영해서 모호한 느낌의 풍경을 연출하기도 하고 또 어렵게 어렵게 합성하기도 합니다. 앗제의 사진은 그 시기쯤에 등장합니다.

앗제는 어렵게 자랐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떠돌이 유랑극단 생활과 온갖 바닥생활을 거쳤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감성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람들의 감성과 닮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감성이 계발되었고, 그 마음은 그의 사진을 통해 드러났다고 보아야 합니다. 나이 들어 앗제는 철저한 생계 수단으로서 사진가라는 직업을 선택합니다. 앗제는 도시의 여러 풍경을 촬영해서 화가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했습니다. 상업사진가가 된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앗제는 한 명의 상업사진가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가까웠을 때 우연하게 만 레이가 그의 사진을 추상예술 잡지에 소개했다는군요. 그렇게 그의 삶 막바지에 그의 사진들은 재발견되었고, 오늘날 전설의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어떤 예술적 자각 업이 오로지 상업 용도로 작업한 그의 사진들이 이제껏 전설로, 사진의 시작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후의 평론가들은 앗제의 사진에 등장하는 독특한 감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불우한 삶이 만들어냈을 그 낮고 무겁고 텅 빈 공간의 느낌들이 앗제를 한 명의 시각적 시인으로 만들어 냅니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누구도 보지 못 한 공간의 호흡을 앗제의 카메라는 침착하게 발견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회의 문법구조를 추종하던 당시의 사진이 아직 시도하지 못 한 영역이었습니다. 관객에게 낯설게 보여주기 위한 가장 편한 방법은 낯선 대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커스가 그렇고 박물관이 그렇고 해외 여행이 그렇겠지요. 그런데 앗제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낯선 인상을 보여주었던 겁니다. 아,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 내가 지극히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내 주변 풍경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순간, 세상은 신나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앗제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진의 문법을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술가의 예술적 자존이 없는 상태에서 제작된 작품이 과연 예술작품일 수 있는가? 라는 현대예술의 물음에 비추어 보면 앗제의 작품은 그 가치를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힘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요. 아무리 그의 의식 없음을 이유로 그 사진들을 내치려고 해도 사진들이 속내는 정말 아름답거든요. 그 태생은 회화를 위한 보조수단이었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사진은 회화가 갖지 못한 사진만의 힘을 갖습니다. 그 사진 안에 스타글리츠도 보이고 브레송도 보입니다. 앗제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을까요?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낸 사람은 모두 그런 사진을 찍을까요? 뭐, 천재성 정도라고 대답하는 게 맞겠지요. 공간이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호흡이 담긴 느낌입니다. 사람들이 로모에 열광하는 이유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이 드러나는 듯한 그 순간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참고한 페이지
http://www.photoman.co.kr/photo/photographer/EugeneAtget.html
http://blog.naver.com/ddalkio7/90039155623
http://blog.daum.net/kafkainnight/604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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