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에 대한 리뷰를 진행합니다. 처음 의도는 사진가들의 사이트를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진가에 대한 기본적 소개, 포트폴리오와 사이트의 구성, 감상까지 다룰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사진의 출발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작가들에 대한 소개는 몇 명만 하고, 본래의 목적대로 현대 사진가들 중심으로 가겠습니다.
나다르 Nadar (Gaspard-Félix Tournachon)
이 사람이 나다르네요.
나다르를 처음 소개하는 이유는, 1. 그가 사진의 시작점에 가까이 있고, 2. 초상사진에 있어서 나다르가 그은 한 획.이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나다르와 초상사진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를 참고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여기 누르세요
1839년 프랑스 의회는 다게르의 사진 기술을 구입하고, 사진에 대한 특허권을 인정합니다. 사진의 탄생.입니다. 여러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나다르는 1820년에 파리 또는 리옹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까지 살았군요. 그러니까 사진이 공식적 탄생은 나다르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사진이 얼마나 빠르게 전파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알려진 대로, 당시는 신흥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한 시기였고, 초상사진에 대한 수요가 많았습니다. 초상화는 그 제작의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여전히 귀족의 소유물이었는데 반해, 사진은 보다 쉽고 싸게 제작할 수 있어서 신흥 부르주아들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기사에 아들 부시가 퇴임을 앞두고 백악관에 걸릴 그의 초상 앞에서 사진을 찍은 내용이 났었지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퇴임 후 한 장의 초상화로 청와대에 남습니다. 사진이 보편화 된 후, 사진이 담지 못 하는 내면을 담기 위해 초상화를 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사실 누구나 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니까, 뭔가 다르게 그림으로 남기려는 것이겠지요. 초상사진은 아직 초상화의 권위를 완전히 얻지 못 한 모양입니다. 곁가지로, 발터 벤야민의 문장 속에서 초상화와 초상사진의 차이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벤야민은 그의 글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속에서 작품의 아우라는 그 유일성에 기초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복제가 있다고 해도 원본의 아우라를 흉내 낼 수는 없다는 말인데요. 문제는 사진의 경우 유일한 원본을 주장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벤야민은 사진 등의 복제예술에서 예술의 가치는 그 유일성 대신 전시성.으로 대체된다고 말합니다. 뭐 그 뒤에는 정치성으로 나가기도 하는데 거기까진 다룰 필요가 없겠지요. 어쨌든, 초기 초상사진은 사진의 저변을 확대하고 또 발전을 이끄는데 많은 기여를 합니다. 위 링크에도 나오지만, 초상사진은 초기부터 상업화됩니다. 많은 수요가 있었으니 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요. 특히 귀족을 흉내내려는 신흥 부르주아들은 그럴듯한 배경 앞에 비슷하게 서서 비슷한 사진을 찍었습니다. “자, 서세요. 팡! 다음, 더세요. 팡! 다음?” 뭐 이런 식이었겠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들은 사람들의 지갑 속에 간직되거나 집 거실에 놓였을 텐데, 결국 다 비슷비슷했겠지요. 얼굴 윤곽을 빼면 말입니다. 상업사진가와 예술가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고 어려운 겁니다. 시작부터 상업사진을 의도한다면 할 말 없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내가 찍는 것인지 카메라가 찍는 것인지 고민하는 단계를 거치는 것 같습니다. 돈 버는 기계에 기댈 것인가? 돈은 우선 접고 나만의 카메라를 부릴 것인가? 나다르는 복사기처럼 찍어내는 이 사진들이 맘에 안 들었나 봅니다.
나다르가 태어나면서부터 카메라를 손에 들고 나온 건 아니었습니다. 사진 발명보다 더 일찍 태어났다니까요. 사진가 이전에 나다르는 캐리커쳐를 그리는 만화가였다고 합니다. 여러 신문에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캐리커쳐는 단시간 내에 피사체의 특징만을 부각시켜내는 작업입니다. 순식간에 대상의 특징을 파악하는 능력이 충분히 배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을, 나다르는 그의 사진에 접목시킵니다. 그럴듯한, 그러나 실제로는 천편일률적인 배경 대신에 최대한 단순한 배경을 쓰고, 해당 인물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포즈와 표정, 그리고 그에 걸맞은 빛을 만듭니다. 물론 주로 자연광을 썼겠지요. 상상이 되지요? 질감이 거친, 어두운 색의 천을 배경으로 걸고 그 앞에 앉은 모델. 물론 한 쪽에서는 넓은 창문으로 오후 빛이 들어오겠지요. 아마 북쪽의 광원을 쓰지 않았을까요? 기존의 엄격한 사진과 달리, 나다르의 사진 속에서 인물들은 조금 더 부드러운 선을 갖고, 또 편안하거나 개성적인 자세로 있습니다. 그것이 나다르의 사진을 특별하게 만들고, 그런 장면을 만든 나다르를 시대의 사진가로 기억하게 합니다.
사진이 복제시대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유일성에 대한 동경은 여전했습니다. 지금도 변함 없잖아요? 나다르의 사진은 그 유일성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남들에게 없는 유일한 특징. 이걸 개성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그 유별남을 나다르의 사진은 담아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당대의 많은 인물들이 나다르의 작업실로 와서 그의 카메라 앞에 섭니다. 들라크루아, 마네, 알퐁스 도데 등등.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아이러니한 인물은 보들레르.겠지요. 악의꽃.이라는 시로 현대시의 시작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보들레르는 시인이기 전에 당대의 평론가였습니다. 그는 특히 사진에 대해 비판적이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술이 되려는 사진의 건방짐’에 대해 비판적이었지요. 사진은 오로지 기술적인 발명이니까 괜히 어줍잖게 예술의 지위를 노리지 마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책을 좀 뒤져 볼까요?
나다르가 찍은 보들레르입니다.
…… 카니발 때의 백정이나 세탁부처럼 차려입고, 사진 촬영에 필요한 시간만큼 표정을 찡그려 주기를 요청받으면서 선남선녀들이 마치 한 무리의 불한당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고대의 비극적이고 매력적인 장면들을 재현할 수 있다고 실제로 믿고 있었습니다. 줏대 있는 작가라면, 대중 속에서 천박하게 널리 퍼져 가던 역사와 회화에 대한 혐오와, 그에 따라 신성한 예술인 회화와 고양된 예술인 연극을 동시에 손상시키는, 이중의 신성모독죄를 목격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사진산업이 게을러서 작업을 완성할 수 없는 화가나 재주 없는 화가들의 피난처가 되면서,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달아오른 열광은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심취의 양상을 띨 뿐 아니라 복수의 측면도 갖게 되었습니다. …… 예술적 행위의 어떤 부문에서 사진으로 하여금 예술을 대신하게 하면, 사진은 자신의 동맹군이라 할 어리석은 대중의 힘ㅇ르 빌어서 오래지 않아 예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예술을 망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진은 마땅히 자신의 원래의 역할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술과 과학의 시녀로서의 일로, 언감생심 문학을 대신한다거나 문학을 만들어낸다고 떠들어대지 못할 도장이나 속기와 같은, 아주 겸손한 시녀로서의 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 샤를 보들레르 ‘근대 대중과 사진’
요렇게 말한 보들레르는 아마 철저히 기술적인 사진 앞에 앉는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그리고 그 기술적 사진 안에서 우리는 보들레르만의 개성.을 읽어냅니다. 아, 보들레르가 죽을 때까지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후기에는 사진의 예술성에 대해 긍정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나다르의 스튜디오. 나다르.라는 간판 보이시지요?
나다르의 사진은 당대에 이미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여러 명사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섰고, 나다르는 대형 스튜디오를 차렸다지요. 그 스튜디오는 기업형으로 운영되었다고 하는데, 촬영과 정리, 암실 작업 등이 모두 분업화되었다고 합니다. 나다르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사진들 중에 나다르가 셔터 누르지 않은 것도 많다는군요. 다만 그는 사진 촬영을 감독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했겠지요. 인물을 파악하고, 인물에 맞는 조건을 만들었을 테니까요. 요즘으로 치면 예술총감독. 요건 중국식 단어군요. 아트디렉터. 요건 영어고요. 흠, 괜찮은 한국어 없나요?
나다르가 초상사진을 찍던 무렵에는 사진을 촬영하는데 제법 긴 노출시간이 필요했던 무렵입니다. 정확히 그 때 얼마나 걸려서 찍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수 초에서 길게는 수 십 초에 이르렀겠지요. 그래서 또 생각해야할 부분은 사진의 힘과 모델의 힘입니다. 긴 노출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순간적인 스냅을 찍기는 어려웠고요. 완벽하게 계산된 앵글 속에서 모델은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필름에 충분한 상이 맺힐 때까지 정지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남아있는 나다르의 사진들 속 인물은 쟁쟁한 사람들이 많지요. 나다르가 창조해 내기 이전부터 내면에 충만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진들이 인물의 아우라를 펼쳐내는 것은 사진가의 힘이라기 보다는 걸출한 모델들의 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새로운 앵글을 시도하고, 초상화를 흉내내는 초상사진이 아니라 초상화와 차별되는 초상사진을 이끈 나다르의 능력을 낮추어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사진가로서의 나다르의 능력은 어쩌면 일부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기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공중사진을 찍기도 했고, 파리의 하수도를 기록하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진의 가능성에 대해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어쩌면 또 모르지요. 미래에서 왔을지.흠. 여기는 살짝 눈 흘기는 이모티콘이라도 쓰고 싶군요.
오늘날에 보아도 나다르의 사진은 초상사진의 어떤 표준처럼 보입니다. 많은 포트레이트 작가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인물상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인물사진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프레임의 한계는 엄연하니까요. 그 출발점에 있는 사진가, 나다르입니다.
나다르가 찍은 더 많은 사진은, 구글에서 나다르.를 검색하세요.
0901 첫째 주.
- 사진은 구글에서 펐습니다.
- 인용한 보들레르의 글은 김우룡, 사진과 텍스트, 2006, 눈빛. 에서 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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