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지냈던, 그런데 오래 지나서 이제 잊었던 사람이 몇 년만에 메일을 보내왔다. 그 친구는 나를 섬.이라고 불렀다. 섬이라... 그 친구 말에 따르면 나와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것이 2002년 정도였다고 하니까, 아마 그 무렵에 나는 섬.이었던 모양이다. 인터넷 이전, 모뎀으로 통신하던 시절에 내 닉네임이었다. 그것도 잊었던 이름이다. 제법 좋은 이름을 썼었구나. 어쩌면 반군.이라는 지금 닉네임보다 낫구나.
섬을 떠나 산 것이 오래 되었다. 한국 갈 때마다 들르는 내 고향 섬은 여전히 포근하지만, 이제 상하이 이 땅이 한국의 어느 도시보다 익숙하고 편하게 되었다. 슬프고 대견하다. 한 통의 이력서를 떠올리게 하는 메일 속에서,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도 졸업했단다.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내가 지나온 시간이 나름 긴 시간이었구나.
욕심나는 출판사 한 곳에 책 원고를 보냈다. 미경 누나의 충고대로 다는 안 보내고 세 꼭지만 보냈다. 한국 상황이 워낙 안 좋다니까, 게다가 나는 서투르고 내 원고는 성그니까 좋은 답이 올 가능성은 제법 낮을 것이다. 그래도 기대는 내 몫이지 않나. 기다려 보고,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되면, 그 때까지도 답이 없으면 출판사에 대한 욕심은 접어야겠다. 내 원고에 관심을 보여주는 곳이면 그냥 떠다 맡겨야겠다. 첫 책은 좀 서투를 모양이다.
손지연.이라는 가수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들었다. 뒤져보니 3집까지 나왔는데, 1,2집은 품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노래 부를 때는 아마도 술 몇 잔 걸치고 반쯤 몽롱한 상태에서 부르는 모양인데, 어쨌든 노래는 좋다. 한국 갈 때까지 기다리기는 멀고, 연락해서 부탁해 보아야겠다. 한국에 있을 때 전영숙 선생님 댁에 가끔 갔었는데, 선생님 댁은 언제나 이틀 코스였다. 그 곳에는 지하 서재가 있거나 옥탑방 서재가 있었다. 저녁쯤에 가면 밤새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음악을 듣다가 새벽에 잠든다. 아침이면 꼬마들이 와서 깨우고, 그러면 식탁에 앉아서 선생님께서 끓여주시는 아침 해장국을 그 집 식구들과 함께 먹는 것이다. 중국 사상(아마 도가풍)을 온몸으로 구현하시던 선생님. 밤이 늦고 술이 거나해지고 이야기도 대충 떨어질 때쯤이면 선생님은 뒤적뒤적하면서 음악을 골라 틀어주셨는데, 그 시간쯤에 듣는 것이라곤 김광석이나 장사익, 한영애, 한대수, 황병기, 오연실 같은 것들이다. 요즘 어디 가서 이런 음악 이야기는 잘 안 한다. 좋아한다는 말도 안 한다. 괜히 엉뚱한 소리 듣기 좋고 분위기 깨기 좋다. 나도 그 정도 분위기는 맞출 줄 안다. 한국에서야 그나마 끼리끼리 모일 수 있었으니 함께 들었다지만, 여기는 잘 없다. 그냥 혼자서 듣고 만다. 그럴 때 가끔 한국이 그립고, 선생님 댁이 그립고, 같이 책장에 등 기대고 앉아서 진심으로 낡고 느리고 서러운 음악에 취하던 사람들이 그립다.
언젠가는 섬에 돌아갈 테다. 오래 걸리겠지만, 아직 무엇도 가지고 돌아갈 것이 없지만 나중에 나중에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소박한 비단옷이라도 입고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섬으로 돌아가야겠다. 가서 소리소리 노래 부르고 살 테다.
섬. 참 좋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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