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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가 많은 날에 호수는 넓어서 다만 아득하다. 가장자리를 치는 물결은 조용해서 이 물들은 어디로도 갈 마음이 없어 보인다. 흘러서 강이 되고 다다라서 바다가 된다는 사실은, 호수의 보이지 않는 저 편에 땅이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단지 배워서 아는 것이다. 눈은 강의 반대편에 닿지 못 하고, 의식은 바다에 닿는 강을 쫓아가지 못 한다. 디엔산호淀山湖. 황푸강黄浦江의 발원지로 알려졌던 곳이다. 호수의 바닥에서부터 솟아난 것이 아니라면, 이 물도 어디선가 왔을 것이다. 호수에서 강으로 흘러 드는 물줄기를 확인한 자전거는 호수로 흘러 드는 물줄기의 꼬리를 잡아며 나아간다. 호수의 서편 끝에서 상하이의 행정구역은 끝나고 있다.
강의 시작을 찾아가겠다는 발상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어디든 가야 했고, 강의 시작은 그럴듯한 목적지처럼 보였다. 그곳에 가면 만능열쇠 같은 답이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문제라도 다 풀어낼 수 있는 답이, 강이 시작하는 거기라면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3일 동안의 여행은 그렇게 출발한다.
1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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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첫 목적지 디엔산호. 자료에 따르면 상하이 행정구역의 서쪽 끝에 있는 이 호수가 예전에는 황푸강의 발원지로 알려졌었다고 한다. 인공수로처럼 보이는 쭉 뻗은 물길을 흘러서 디엔산호의 물은 황푸강이 된다. 이후에 디엔산호보다 더 서편에 있는 타이호太湖가 발원지일 것으로 추정되고, 1990년대 한 학자의 연구와 답사에 의해 마침내 절강성 안지현安吉의 롱왕산龙王山 계곡이 진짜 발원지로 밝혀진다. 자전거는 디엔산호와 타이호를 거쳐 산 속으로 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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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한 편에 자전거를 눕히고 쉰다. 가장자리를 치는 물결 소리가 편안하다. 자전거를 타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 중에 하나는 자전거의 질주본능이다. 달리는 연습만큼 멈추는 연습도 필요하다. 자전거는 올라타면 자꾸 달리려고 해서 마음 속에 정한 목적지 전에는 쉬이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저녁까지 달리고 돌아보면 내가 지나온 길은 보이지 않고 지친 몸만 보인다.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다. 어서 가려는 자전거를 잡아 채며 오늘 여행은 가다 서다를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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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후조우湖州까지 이어진 318번 국도를 따라 달리던 자전거는 태호를 보기 위해 방향을 비튼다. 이제부터는 230번 성도다. 길 주변은 작은 호수들 천지다. 중국 남방 지역에 통일왕조가 성립되기 어려웠던 것은 늪지가 많았기 때문이라던 학부 시절 강의 내용이 떠오른다. 사방 펼친 호수와 수로에서 배는 오가고 소리도 없는 풍경 속에서 어부는 그물을 당긴다. 풍경은 날 때부터 거리를 내재한 단어다. 풍경을 인식하는 것은 나와 장면 사이의 거리를 느끼는 것이고, 내가 그 안에 들어갔을 때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닐 것이다. 안개 속에서 느리고 고요하게 그물을 끌어올리는 저 장면 속에 나는 영영 닿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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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해는 짧다. 느릿느릿 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자꾸만 기우는 해와 오늘 저녁 숙소까지의 거리를 번갈아 보고 생각하니 머뭇거릴 틈이 없다. 다시 318번 국도, 점심 거른 속이 걱정되지만 조금씩 등장하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 이쯤 되면 허벅지는 뿔나서 말을 안 듣고 엉덩이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하늘이 짙은 남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하려는 무렵에 후조우 시내에 도착했다. 위험요소가 많은 야간 라이딩을 피하기 위해 두어 시간 힘껏 오니 속은 울렁거리고 다리는 풀려서 서 있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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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거리 147km / 페달 구른 시간 7:41
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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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우를 떠난 지 네 시간. 안지현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한 황푸강디이피아오黄浦江第一漂 표지판. 예상보다 많이 가깝다. 이대로 간다면 점심 무렵에는 도착할 수 있고, 오늘 중으로 상하이행 저녁 차를 탈 수도 있다. 먹은 것 없는 몸에 힘이 돈다. 226km. 하루 반을 달려왔다. 황포강의 시작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도착한 곳은 황푸강디이피아오. 느낌이 어색하다. 정오의 햇살이 따뜻하고 아무도 없는 주변은 고요하다. 바람만 가끔 옅게 불고 놀란 물새가 두어 마리 수면을 친다. 근원이라는 단어가 갖는 신비감의 정체는 여기에 무엇도 없다. 어찌된 일일까? 쇠락한 놀이동산 느낌이다. 입구 매표소는 겨우 문 닫았고 주차장은 비었다. 주변 몇 곳의 식당도 겨우 문만 열어두고 있다. 정말 여기인가? 안내문에는 이 곳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가량 내려 간다고 쓰여 있고 뱃삯 80원이라고 적혀 있다. 아, 뱃놀이 하는 곳이었나? 배들은 모두 뭍으로 끌어올려져서 비닐 장막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 있었을 때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에 간 적이 있었다. 낙동강은 태백시의 한 가운데 있는 황지연못에서 발원하고 한강은 그 곳에서 10km쯤 떨어진 산 속 검룡소에서 발원한다. 맑고 차가운 물이 땅 속에서 솟아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10년쯤 지난 그 장면을 꼭 같이 기대하며 온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발원지의 기억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여기까지 오는 내내 그 장면이 머리에 남았다. 여기는 아닌 모양이다. 썩어 고인 물의 위쪽은 여전히 흐르고 있어서, 저 위 어디에서 이 강의 이름은 출발하고 있노라고 말한다. 아마 들었던 대로 롱왕산 어디쯤에서 물은 솟아나고 있을 것이다. 됐다. 탐사가가 될 생각은 없다. 이번 여행은 여기까지다.
여행의 끝을 다짐했지만 아쉬운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이것이었나 싶은 마음을 다독여야겠다. 옆 식당에 들어가 별 기대도 없이 묻는다.
“여기가 정말 황포강의 시작인가요?”
“아, 거기? 여기서 저 길 따라서 40km쯤 더 가야 해요.”
“40km요? 음, 거긴 확실히 표지판이 있긴 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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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마지막 계곡을 지나서 입구에 도착했다. 상하이에서 266km 떨어진 곳이다. 아래 민박집에서는 30분이 걸린다고 했으니 입구를 지나면 곧장일 것이다. 이 풍성한 물이 솟아나는 장면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지만, 발원지라고 했으니 아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원지는 계곡 속에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없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둘 곳이 안 보인다. 이미 날이 늦었으니 아래 민박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걸어서 발원지를 보러 가기로 한다. 이 작은 결정이 가져올 사태를 이 때는 몰랐다.
비수기여서일까? 계곡 곳곳에 있는 민박집들은 손님이 없다. 방을 잡고 자전거를 방 안에 옮긴 다음 민박집 식구들과 함께 놀고 그들의 식탁에 숟가락 하나만 얹어서 함께 저녁을 먹는다. 내일이면, 강의 시작을 본다.
누적 주행거리 247km
3일차
가난한 여행자는 입장료를 피하기 위해 새벽 길에 나선다. 휴대용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까만 산길을 1km쯤 걸으면 입구가 나오고 그 곳에서부터 이정표를 따라가면 황푸강의 발원지에 닿을 수 있다. 30분이면 된다고 했다. 분명히. 30분 걸으니까 작은 폭포가 보인다. 작은 크기에 비해 내리쏟는 물줄기는 제법 거세다. 잠시 감상하고 사진 찍고 다시 상류로 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바로 아래까지 보이던 ‘황푸강위엔토우黄浦江源头’라는 표지판이 안 보인다. 어찌된 것일까? 뭐 상관 없다. 물은 아직도 거세게 흘러내려 오고 있으니 저 위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샘솟는 물의 근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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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였었나? 입장료 아끼겠다고 너무 어두운 새벽에 왔다. 그래서 미처 글씨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등산의 무모함이란. 모든 강이 샘에서 발원한다는 작은 생각이 나를 산 속 어딘가 있지도 않는 샘으로 몰았다. 황푸강은 산의 온몸에서 발원하고 있다. 올라가면서 이미 수 많은 물줄기를 확인하고도 믿지 못 했던 어리석음을 탓해보지만 이미 시간은 흘렀고 몸은 지쳤다. 발원지를 확인하고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떠나려는 계획도 이미 늦었다.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강은 한 점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구나. 롱왕산의 여기저기가 강의 발원이고 태호와 디엔산호가 모두 황푸강의 발원인 것을 이제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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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전거를 타고 안지현으로 돌아가서 상하이로 가는 버스를 타면 여행은 끝난다. 항주로 가서 기차를 타려던 계획은 새벽 등산 때문에 수정해야 했다. 안지현까지 50여km를 달려 간다. 자전거를 분해해서 미리 가져온 전용가방에 넣고 상하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가져온 질문도 모호했고 얻은 답은 더욱 모호하다. 남은 질문은 다음 여행 때 다시 물어야겠다. 얼른 집으로 가서 따뜻한 밥 한 공기에 잘 익은 김치를 얹어 먹어야겠다.
황푸강을 보고 나니 괜히 장강의 시작이 궁금해진다. 아, 장강은 6300km라던데……
총 주행거리 31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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