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젠느 앗제 (Jean Eugene Auguest Atget)
1856∼1927
어느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마 예술에 대한 쉬운 소개서였을 겁니다. 한 전시가 있었는데, 유명한 화가 한 명이 캔버스 전체를 붉은 색으로 칠한 작품을 내어 놓았답니다. 아무 것도 없고, 그냥 붉은 색이었답니다. 작가는 민족의 아픔을 표현했다며 오로지 붉은 색으로 채워진 작품의 의미를 설명했고, 그 작품은 나름대로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전시를 관람하던 관객의 질문이었습니다. 관객은 페인트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지요. 큐레이터를 향해 묻기를,
“나는 페인트 색을 테스트하기 위해 화면 전체를 한 가지 색으로 칠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린 것도 작품 아닙니까? 똑같은데요.”
큐레이터의 대답은 당연하고 단호하게 ‘아니다.’였겠지요. 예술에 대해 별다른 공부가 없는 사람도 이 대답에 동의할 겁니다. 조금 머뭇거리기는 하겠고, 또 긴가민가하겠지만요. 예술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가며 역시 이 대답을 당연시할 겁니다. 뭐 그 이유가 맞는지 알 길은 없겠지만요.
과거 예술이 기술의 숙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때, ‘예술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작업은 비교적 쉬웠습니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긴 시간 동안 기술을 수련해야 했습니다. 그 수련은 일정 수준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건축이 그랬고 회화가 그랬고 조각이 그랬고 또 음악이 그랬습니다. 아주 세밀한 부분을 제외하면 누구나 예술가의 작품이 잘 된 것인지 그렇지 못 한 것인지 알아챌 수 있었고, 또 그 감동의 크기를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예술은 그 관념을 하나씩 깨면서 옵니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때는 뒤상이 변기 하나를 들고 나타난 때였습니다. 이 변기는,
“예술가의 예술적 아이디어가 곧 예술이다.”는 뒤상의 선언문이었습니다. 예술적 아이디어 역시 분명한 수련과 학습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 결과물은 예전처럼 쉽게 파악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작품은 작가의 배경을 함께 파악해야 비로소 읽을 수 있게 되는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작가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작품 앞에 서는 것만으로는 도대체 모를 혼란 속에 서기 쉽습니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곧 작가의 의식세계에 대한 평가로 이어집니다. 그 기술적 테크닉에 대한 찬사는 이제 첫 번째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앗제의 이야기를 합시다. 지루한 이야기를 덧붙인 것은 앗제의 사진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논쟁중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의 발명 이후 사진은 기술적 발전과 동시에 예술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밖으로 보기에 사진과 가장 닮은 기존의 예술장르는 회화였고, 사진은 이 회화를 복제함으로써 회화가 가지고 있는 예술의 지위를 공유하고, 사진가는 화가와 동격의 지위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앞서 썼듯이 그런 시도는 보들레르를 비롯한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들었고요. 좀 더 회화처럼 보이기 위해 회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을 연출하고, 일부러 초점을 흐리게 촬영해서 모호한 느낌의 풍경을 연출하기도 하고 또 어렵게 어렵게 합성하기도 합니다. 앗제의 사진은 그 시기쯤에 등장합니다.
앗제는 어렵게 자랐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떠돌이 유랑극단 생활과 온갖 바닥생활을 거쳤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감성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람들의 감성과 닮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감성이 계발되었고, 그 마음은 그의 사진을 통해 드러났다고 보아야 합니다. 나이 들어 앗제는 철저한 생계 수단으로서 사진가라는 직업을 선택합니다. 앗제는 도시의 여러 풍경을 촬영해서 화가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했습니다. 상업사진가가 된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앗제는 한 명의 상업사진가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가까웠을 때 우연하게 만 레이가 그의 사진을 추상예술 잡지에 소개했다는군요. 그렇게 그의 삶 막바지에 그의 사진들은 재발견되었고, 오늘날 전설의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어떤 예술적 자각 업이 오로지 상업 용도로 작업한 그의 사진들이 이제껏 전설로, 사진의 시작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후의 평론가들은 앗제의 사진에 등장하는 독특한 감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불우한 삶이 만들어냈을 그 낮고 무겁고 텅 빈 공간의 느낌들이 앗제를 한 명의 시각적 시인으로 만들어 냅니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누구도 보지 못 한 공간의 호흡을 앗제의 카메라는 침착하게 발견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회의 문법구조를 추종하던 당시의 사진이 아직 시도하지 못 한 영역이었습니다. 관객에게 낯설게 보여주기 위한 가장 편한 방법은 낯선 대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커스가 그렇고 박물관이 그렇고 해외 여행이 그렇겠지요. 그런데 앗제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낯선 인상을 보여주었던 겁니다. 아,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 내가 지극히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내 주변 풍경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순간, 세상은 신나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앗제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진의 문법을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술가의 예술적 자존이 없는 상태에서 제작된 작품이 과연 예술작품일 수 있는가? 라는 현대예술의 물음에 비추어 보면 앗제의 작품은 그 가치를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힘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요. 아무리 그의 의식 없음을 이유로 그 사진들을 내치려고 해도 사진들이 속내는 정말 아름답거든요. 그 태생은 회화를 위한 보조수단이었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사진은 회화가 갖지 못한 사진만의 힘을 갖습니다. 그 사진 안에 스타글리츠도 보이고 브레송도 보입니다. 앗제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을까요?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낸 사람은 모두 그런 사진을 찍을까요? 뭐, 천재성 정도라고 대답하는 게 맞겠지요. 공간이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호흡이 담긴 느낌입니다. 사람들이 로모에 열광하는 이유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이 드러나는 듯한 그 순간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참고한 페이지
http://www.photoman.co.kr/photo/photographer/EugeneAtget.html
http://blog.naver.com/ddalkio7/90039155623
http://blog.daum.net/kafkainnight/6045152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 효형출판
1998 7월 초판 발행
2006 6월 2판 4쇄 발행
내가 사는 집 화장실 변기 뒤에는 책이 두어 권 있다. 화징실 책들은 오래 간다. 보통이 두어 달이다. 유시민의 경제학 책은 족히 대여섯 달쯤 되었다. 아침마다 변기에 앉아 있는 잠시 동안에 읽는 것이 고작이니까 끽해야 하루 한 두 장이다. 거의 모든 장 모서리마다 접혀있다. 모든 장마다에서 멈췄다는 뜻이다. 건축에 대한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책은 화장실책 출신이다. 출신.이라고 밝혀두는 것은 출신과 현재가 다르다는 의미다. 책이 1/4쯤 남았을 때 화장실에서 가져 나왔다. 아침에 인터넷 기사 하나 보고,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어서 해야겠다 싶었다.
입만 열면 똥내가 나는 이명박의 말이었다. 지방 행정관청들이 왜 그리 높은 로비를 가진 그럴듯한 건물을 짓냐는 야단이었다. 경제도 어려운데 그런 쓸데없는 돈을 쓰지 말라는 딴에는 근검 절약하는 소리였다. 앞으로는 공공기관 건물을 아파트처럼 지으라신다. 아침 식사하시던 이 땅의 많은 건축가들 혈압 좀 올랐겠다. 천박하다. 말끝마다 그 기본 없음이 절절히 드러난다. 그 서툰 입을 변호한다는 자들의 입 또한 다를 것 없다. 알고 속이는 것들은 더 나쁘다. 아, 이명박의 입에서 똥내 난다는 말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맞춤법도 무시하는 것이 예사니 문학이란 것도 알 리 없겠구나. 비유법이라는 것이다. 나 잡아가지 마라.
건축가가 쓴 에세이다. 서현.이라는 이름이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는 연예인처럼 이름난 몇몇 건축가의 이름을 내 장식처럼 아는 것이 고작이라서 이 이름은 처음이다. 검은 표지의 책은 한 권의 건축물 같다. 그 구조의 단단함이 잘 지어 올린 한 채 집 같다. 차례만 보아도 책의 단단함을 알 수 있다. 공간을 정의하고, 공간을 장악하고 또 비례를 맞추고 공간 속의 비어있음에 대해 말하고 공간을 구축하는 질서와 질서의 단단함, 그리고 공간을 감상하는 겸손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아무런 실체 없이 흐느적거리는 감상으로 질척거리는 책들이 많은 요즘에, 이 책은 단단한 실체와 실체를 꾸미는 정돈된 문장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단단하고 고운 문장들이다. 도대체 건축가라는 사람이 문장을 이렇게 잘 써도 되는 것인가? 건축가이기 때문에 이런 군더더기 없고 잘 구축된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땅의 건축가들은 모두 이런 문장을 구사한단 말인가? 책 읽는 순간마다 내가 쓴 문장에 생각이 닿아서 부끄러웠다. 내 글은 어땠는가? 출판하겠다고 끄적거린 문장들에 대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글이 너무 어지럽다’는 지적을 몇 곳에서 들었다. 제대로 된 설계도 없이 시작한 글이어서 그렇다. 기존에 써 두었던 인터뷰도 끌어오고 여행기도 가져다 붙이고 버리기 아까운 메모들도 끼웠다. 여기서 나무 토막 하나 저기서 벽돌 한 장 식으로 주워서는 보기에만 그럴 듯하기를 바라며 얼기설기 지어 올린 집이 된 모양이다. 아, 허물어야 하나. 그럴 용기도 없다만.
상하이의 빌딩들은 그 모양이 제각각이다. 건축법으로 정해놓아서,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은 그 디자인이 반드시 다른 것들과 달라야 한다. 그렇게 건축하려고 들면 설계비부터 해서 완공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더 많은 공사비가 들 것인데,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현재의 상하이를 보면 누구나 공감하게 된다. 서로 다른 모양의 건물들이 모여서 만든 상하이의 빌딩 숲은 보기에 좋다. 건축을 모르는 입장에서, 나는 건축가의 고민은 어떻게 좀 더 다르게 보일까? 어떻게 좀 더 그럴 듯하게 보일까? 정도가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러 건축가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건축이란, 사람의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건축가가 어떤 동선을 짜느냐, 어떤 방식으로 층을 올리느냐에 따라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바뀐다. 그래서 건축이 위대하고 또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땅 위에 직립하고 선 빼곡한 건축물들 속에는 당대의 삶에 대한 건축가의 치열한 고민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의 종착지는 건축이라던 바우하우스의 선언은 제법 맞는 말인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길 걸으며 보는 모든 건축물들을 다시 본다. 그 정신까지 읽어내는 것은 요원하겠지만, 그래도 건축의 정신을 보려는 내 시도가 반갑다.
서현 / 효형출판
1998 7월 초판 발행
2006 6월 2판 4쇄 발행
내가 사는 집 화장실 변기 뒤에는 책이 두어 권 있다. 화징실 책들은 오래 간다. 보통이 두어 달이다. 유시민의 경제학 책은 족히 대여섯 달쯤 되었다. 아침마다 변기에 앉아 있는 잠시 동안에 읽는 것이 고작이니까 끽해야 하루 한 두 장이다. 거의 모든 장 모서리마다 접혀있다. 모든 장마다에서 멈췄다는 뜻이다. 건축에 대한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책은 화장실책 출신이다. 출신.이라고 밝혀두는 것은 출신과 현재가 다르다는 의미다. 책이 1/4쯤 남았을 때 화장실에서 가져 나왔다. 아침에 인터넷 기사 하나 보고,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어서 해야겠다 싶었다.
입만 열면 똥내가 나는 이명박의 말이었다. 지방 행정관청들이 왜 그리 높은 로비를 가진 그럴듯한 건물을 짓냐는 야단이었다. 경제도 어려운데 그런 쓸데없는 돈을 쓰지 말라는 딴에는 근검 절약하는 소리였다. 앞으로는 공공기관 건물을 아파트처럼 지으라신다. 아침 식사하시던 이 땅의 많은 건축가들 혈압 좀 올랐겠다. 천박하다. 말끝마다 그 기본 없음이 절절히 드러난다. 그 서툰 입을 변호한다는 자들의 입 또한 다를 것 없다. 알고 속이는 것들은 더 나쁘다. 아, 이명박의 입에서 똥내 난다는 말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맞춤법도 무시하는 것이 예사니 문학이란 것도 알 리 없겠구나. 비유법이라는 것이다. 나 잡아가지 마라.
건축가가 쓴 에세이다. 서현.이라는 이름이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는 연예인처럼 이름난 몇몇 건축가의 이름을 내 장식처럼 아는 것이 고작이라서 이 이름은 처음이다. 검은 표지의 책은 한 권의 건축물 같다. 그 구조의 단단함이 잘 지어 올린 한 채 집 같다. 차례만 보아도 책의 단단함을 알 수 있다. 공간을 정의하고, 공간을 장악하고 또 비례를 맞추고 공간 속의 비어있음에 대해 말하고 공간을 구축하는 질서와 질서의 단단함, 그리고 공간을 감상하는 겸손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아무런 실체 없이 흐느적거리는 감상으로 질척거리는 책들이 많은 요즘에, 이 책은 단단한 실체와 실체를 꾸미는 정돈된 문장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단단하고 고운 문장들이다. 도대체 건축가라는 사람이 문장을 이렇게 잘 써도 되는 것인가? 건축가이기 때문에 이런 군더더기 없고 잘 구축된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땅의 건축가들은 모두 이런 문장을 구사한단 말인가? 책 읽는 순간마다 내가 쓴 문장에 생각이 닿아서 부끄러웠다. 내 글은 어땠는가? 출판하겠다고 끄적거린 문장들에 대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글이 너무 어지럽다’는 지적을 몇 곳에서 들었다. 제대로 된 설계도 없이 시작한 글이어서 그렇다. 기존에 써 두었던 인터뷰도 끌어오고 여행기도 가져다 붙이고 버리기 아까운 메모들도 끼웠다. 여기서 나무 토막 하나 저기서 벽돌 한 장 식으로 주워서는 보기에만 그럴 듯하기를 바라며 얼기설기 지어 올린 집이 된 모양이다. 아, 허물어야 하나. 그럴 용기도 없다만.
상하이의 빌딩들은 그 모양이 제각각이다. 건축법으로 정해놓아서,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은 그 디자인이 반드시 다른 것들과 달라야 한다. 그렇게 건축하려고 들면 설계비부터 해서 완공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더 많은 공사비가 들 것인데,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현재의 상하이를 보면 누구나 공감하게 된다. 서로 다른 모양의 건물들이 모여서 만든 상하이의 빌딩 숲은 보기에 좋다. 건축을 모르는 입장에서, 나는 건축가의 고민은 어떻게 좀 더 다르게 보일까? 어떻게 좀 더 그럴 듯하게 보일까? 정도가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러 건축가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건축이란, 사람의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건축가가 어떤 동선을 짜느냐, 어떤 방식으로 층을 올리느냐에 따라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바뀐다. 그래서 건축이 위대하고 또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땅 위에 직립하고 선 빼곡한 건축물들 속에는 당대의 삶에 대한 건축가의 치열한 고민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의 종착지는 건축이라던 바우하우스의 선언은 제법 맞는 말인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길 걸으며 보는 모든 건축물들을 다시 본다. 그 정신까지 읽어내는 것은 요원하겠지만, 그래도 건축의 정신을 보려는 내 시도가 반갑다.
가기 전에 돌아본다
아마 대통령 경호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그들은 아침마다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는다고 했다. 매일이 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만약에 오늘 죽어서 누군가 내 죽은 몸을 치워내게 될 때, 깨끗한 몸으로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아저씨 속옷같은 하얀 속옷은 비장한 각오와 잘 섞여 보이지 않았지만 그 하얀 색깔은 그들의 뜻과 맞아 보였다.
긴 여행이나 무모해보이는 여행 앞에서 나는 매번 뒤돌아본다. 집 나서기 전날에는 설겆이도 하고 사방에 널린 옷들도 제법 정리하고 쓰레기도 비워내고 집안도 정돈한다. 겁나서 그런다. 내가 다시 이 곳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런다. 여행 떠나기 전날에는 매번 새 여행을 후회한다. 왜 떠나겠다고 했을까? 지금이라도 다시 짐을 풀고 앉으면 안 될까? 싶다. 꾸려놓은 짐들과 뱉어놓은 말들에 떠밀려서 내 여행은 시작된다. 출발하기 전날의 두려움은 익숙해질 듯한데 매번 낯설고, 다만 두려움에 주저하는 내 모습만 친근하다. 만나고 헤어질 때, 머물다가 떠나갈 때 내 지난 모습이 가지런하게 보였으면 좋겠다. 여기 저기 사방 흩어둔 난삽함 말고, 가지런하고 분명한 선들로 남았으면 좋겠다.
여행이라고 떠나는 것이 오랜만이다. 긴장하며 떠나는 여행은 몇 년만이다. 짧은 여행이 될 것인데 한참만에 가는 것이다 보니 마음 속에서는 더 길다. 일주일쯤 전에 가려던 것인데 날씨가 맞지 않아서 이제야 간다. 새벽마다 일어나서 하늘을 보고 다시 눕고 다시 눕고 했다. 짐은 대충 꾸려 두었다. 상하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황푸강의 발원지로 간다. 강의 발원지라는 목적지는 별 의미 없다. 다만 어디든 가야했고 그래서 어디든 찍은 것이다. 자전거는 새벽 지하철을 타고 상하이의 남서쪽 외곽으로 가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과거 황푸강의 발원지로 알려졌으나 이제 아닌 것으로 알려진 딩정호가 1차 목적지다. 아마 서너 시간이 못 걸릴 것이다.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가면 태호에 닿는다. 아마 점심 시간쯤일 것이다. 태호는 장쑤성과 절강성을 나눈다. 다시 남서쪽으로 국도를 타면 절강성 후조우에 닿는데, 느긋하려면 이 곳에서 하루 묵을 것이고, 마음이 쫓기면 더 가서 안시까지 갈 것이다. 안시에서 목적지 용왕산까지는 다섯 시간쯤 걸릴 것이다. 국도도 아니고 성도도 아니고 현도에 해당하는 길이라서 길사정이 좋지는 않을 것이고, 산을 향해 가는 길이니 경사도 있을 것이다. 도착 시간에 따라 당일 등산하거나, 산 아래에서 묵은 후 3일째 되는 날 등산하려고 한다. 1500미터가 넘는 산인데, 이 산 어디쯤에서 황포강은 발원한다. 하산한 후에는 최대한 수월한 방법을 찾아서 상하이로 돌아올 것이다. 자전거를 담을 수 있는 전용가방을 따로 가져간다.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를 빼면 들어가는 크기다. 아마 가까운 항주까지 자전거로 간 다음 상하이로 오는 기차에 자전거를 실어 오거나, 운이 좋으면 산 아래에서 상하이행 관광버스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은 꽉 찬 3일쯤 걸릴 것이다.
지내다 보면, 여행이 고플 때도 있고, 여행이 절박할 때도 있다. 절박한 여행을 한참동안 미루어오다가, 내일 간다. 나는 건강하게 돌아오겠다.
긴 여행이나 무모해보이는 여행 앞에서 나는 매번 뒤돌아본다. 집 나서기 전날에는 설겆이도 하고 사방에 널린 옷들도 제법 정리하고 쓰레기도 비워내고 집안도 정돈한다. 겁나서 그런다. 내가 다시 이 곳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런다. 여행 떠나기 전날에는 매번 새 여행을 후회한다. 왜 떠나겠다고 했을까? 지금이라도 다시 짐을 풀고 앉으면 안 될까? 싶다. 꾸려놓은 짐들과 뱉어놓은 말들에 떠밀려서 내 여행은 시작된다. 출발하기 전날의 두려움은 익숙해질 듯한데 매번 낯설고, 다만 두려움에 주저하는 내 모습만 친근하다. 만나고 헤어질 때, 머물다가 떠나갈 때 내 지난 모습이 가지런하게 보였으면 좋겠다. 여기 저기 사방 흩어둔 난삽함 말고, 가지런하고 분명한 선들로 남았으면 좋겠다.
여행이라고 떠나는 것이 오랜만이다. 긴장하며 떠나는 여행은 몇 년만이다. 짧은 여행이 될 것인데 한참만에 가는 것이다 보니 마음 속에서는 더 길다. 일주일쯤 전에 가려던 것인데 날씨가 맞지 않아서 이제야 간다. 새벽마다 일어나서 하늘을 보고 다시 눕고 다시 눕고 했다. 짐은 대충 꾸려 두었다. 상하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황푸강의 발원지로 간다. 강의 발원지라는 목적지는 별 의미 없다. 다만 어디든 가야했고 그래서 어디든 찍은 것이다. 자전거는 새벽 지하철을 타고 상하이의 남서쪽 외곽으로 가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과거 황푸강의 발원지로 알려졌으나 이제 아닌 것으로 알려진 딩정호가 1차 목적지다. 아마 서너 시간이 못 걸릴 것이다.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가면 태호에 닿는다. 아마 점심 시간쯤일 것이다. 태호는 장쑤성과 절강성을 나눈다. 다시 남서쪽으로 국도를 타면 절강성 후조우에 닿는데, 느긋하려면 이 곳에서 하루 묵을 것이고, 마음이 쫓기면 더 가서 안시까지 갈 것이다. 안시에서 목적지 용왕산까지는 다섯 시간쯤 걸릴 것이다. 국도도 아니고 성도도 아니고 현도에 해당하는 길이라서 길사정이 좋지는 않을 것이고, 산을 향해 가는 길이니 경사도 있을 것이다. 도착 시간에 따라 당일 등산하거나, 산 아래에서 묵은 후 3일째 되는 날 등산하려고 한다. 1500미터가 넘는 산인데, 이 산 어디쯤에서 황포강은 발원한다. 하산한 후에는 최대한 수월한 방법을 찾아서 상하이로 돌아올 것이다. 자전거를 담을 수 있는 전용가방을 따로 가져간다.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를 빼면 들어가는 크기다. 아마 가까운 항주까지 자전거로 간 다음 상하이로 오는 기차에 자전거를 실어 오거나, 운이 좋으면 산 아래에서 상하이행 관광버스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은 꽉 찬 3일쯤 걸릴 것이다.
지내다 보면, 여행이 고플 때도 있고, 여행이 절박할 때도 있다. 절박한 여행을 한참동안 미루어오다가, 내일 간다. 나는 건강하게 돌아오겠다.
2009년 1월 8일 목요일
나다르 Nadar
사진가에 대한 리뷰를 진행합니다. 처음 의도는 사진가들의 사이트를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진가에 대한 기본적 소개, 포트폴리오와 사이트의 구성, 감상까지 다룰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사진의 출발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작가들에 대한 소개는 몇 명만 하고, 본래의 목적대로 현대 사진가들 중심으로 가겠습니다.
나다르 Nadar (Gaspard-Félix Tournachon)
이 사람이 나다르네요.
나다르를 처음 소개하는 이유는, 1. 그가 사진의 시작점에 가까이 있고, 2. 초상사진에 있어서 나다르가 그은 한 획.이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나다르와 초상사진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를 참고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여기 누르세요
1839년 프랑스 의회는 다게르의 사진 기술을 구입하고, 사진에 대한 특허권을 인정합니다. 사진의 탄생.입니다. 여러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나다르는 1820년에 파리 또는 리옹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까지 살았군요. 그러니까 사진이 공식적 탄생은 나다르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사진이 얼마나 빠르게 전파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알려진 대로, 당시는 신흥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한 시기였고, 초상사진에 대한 수요가 많았습니다. 초상화는 그 제작의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여전히 귀족의 소유물이었는데 반해, 사진은 보다 쉽고 싸게 제작할 수 있어서 신흥 부르주아들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기사에 아들 부시가 퇴임을 앞두고 백악관에 걸릴 그의 초상 앞에서 사진을 찍은 내용이 났었지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퇴임 후 한 장의 초상화로 청와대에 남습니다. 사진이 보편화 된 후, 사진이 담지 못 하는 내면을 담기 위해 초상화를 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사실 누구나 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니까, 뭔가 다르게 그림으로 남기려는 것이겠지요. 초상사진은 아직 초상화의 권위를 완전히 얻지 못 한 모양입니다. 곁가지로, 발터 벤야민의 문장 속에서 초상화와 초상사진의 차이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벤야민은 그의 글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속에서 작품의 아우라는 그 유일성에 기초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복제가 있다고 해도 원본의 아우라를 흉내 낼 수는 없다는 말인데요. 문제는 사진의 경우 유일한 원본을 주장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벤야민은 사진 등의 복제예술에서 예술의 가치는 그 유일성 대신 전시성.으로 대체된다고 말합니다. 뭐 그 뒤에는 정치성으로 나가기도 하는데 거기까진 다룰 필요가 없겠지요. 어쨌든, 초기 초상사진은 사진의 저변을 확대하고 또 발전을 이끄는데 많은 기여를 합니다. 위 링크에도 나오지만, 초상사진은 초기부터 상업화됩니다. 많은 수요가 있었으니 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요. 특히 귀족을 흉내내려는 신흥 부르주아들은 그럴듯한 배경 앞에 비슷하게 서서 비슷한 사진을 찍었습니다. “자, 서세요. 팡! 다음, 더세요. 팡! 다음?” 뭐 이런 식이었겠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들은 사람들의 지갑 속에 간직되거나 집 거실에 놓였을 텐데, 결국 다 비슷비슷했겠지요. 얼굴 윤곽을 빼면 말입니다. 상업사진가와 예술가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고 어려운 겁니다. 시작부터 상업사진을 의도한다면 할 말 없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내가 찍는 것인지 카메라가 찍는 것인지 고민하는 단계를 거치는 것 같습니다. 돈 버는 기계에 기댈 것인가? 돈은 우선 접고 나만의 카메라를 부릴 것인가? 나다르는 복사기처럼 찍어내는 이 사진들이 맘에 안 들었나 봅니다.
나다르가 태어나면서부터 카메라를 손에 들고 나온 건 아니었습니다. 사진 발명보다 더 일찍 태어났다니까요. 사진가 이전에 나다르는 캐리커쳐를 그리는 만화가였다고 합니다. 여러 신문에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캐리커쳐는 단시간 내에 피사체의 특징만을 부각시켜내는 작업입니다. 순식간에 대상의 특징을 파악하는 능력이 충분히 배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을, 나다르는 그의 사진에 접목시킵니다. 그럴듯한, 그러나 실제로는 천편일률적인 배경 대신에 최대한 단순한 배경을 쓰고, 해당 인물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포즈와 표정, 그리고 그에 걸맞은 빛을 만듭니다. 물론 주로 자연광을 썼겠지요. 상상이 되지요? 질감이 거친, 어두운 색의 천을 배경으로 걸고 그 앞에 앉은 모델. 물론 한 쪽에서는 넓은 창문으로 오후 빛이 들어오겠지요. 아마 북쪽의 광원을 쓰지 않았을까요? 기존의 엄격한 사진과 달리, 나다르의 사진 속에서 인물들은 조금 더 부드러운 선을 갖고, 또 편안하거나 개성적인 자세로 있습니다. 그것이 나다르의 사진을 특별하게 만들고, 그런 장면을 만든 나다르를 시대의 사진가로 기억하게 합니다.
사진이 복제시대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유일성에 대한 동경은 여전했습니다. 지금도 변함 없잖아요? 나다르의 사진은 그 유일성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남들에게 없는 유일한 특징. 이걸 개성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그 유별남을 나다르의 사진은 담아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당대의 많은 인물들이 나다르의 작업실로 와서 그의 카메라 앞에 섭니다. 들라크루아, 마네, 알퐁스 도데 등등.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아이러니한 인물은 보들레르.겠지요. 악의꽃.이라는 시로 현대시의 시작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보들레르는 시인이기 전에 당대의 평론가였습니다. 그는 특히 사진에 대해 비판적이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술이 되려는 사진의 건방짐’에 대해 비판적이었지요. 사진은 오로지 기술적인 발명이니까 괜히 어줍잖게 예술의 지위를 노리지 마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책을 좀 뒤져 볼까요?
나다르가 찍은 보들레르입니다.
…… 카니발 때의 백정이나 세탁부처럼 차려입고, 사진 촬영에 필요한 시간만큼 표정을 찡그려 주기를 요청받으면서 선남선녀들이 마치 한 무리의 불한당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고대의 비극적이고 매력적인 장면들을 재현할 수 있다고 실제로 믿고 있었습니다. 줏대 있는 작가라면, 대중 속에서 천박하게 널리 퍼져 가던 역사와 회화에 대한 혐오와, 그에 따라 신성한 예술인 회화와 고양된 예술인 연극을 동시에 손상시키는, 이중의 신성모독죄를 목격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사진산업이 게을러서 작업을 완성할 수 없는 화가나 재주 없는 화가들의 피난처가 되면서,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달아오른 열광은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심취의 양상을 띨 뿐 아니라 복수의 측면도 갖게 되었습니다. …… 예술적 행위의 어떤 부문에서 사진으로 하여금 예술을 대신하게 하면, 사진은 자신의 동맹군이라 할 어리석은 대중의 힘ㅇ르 빌어서 오래지 않아 예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예술을 망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진은 마땅히 자신의 원래의 역할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술과 과학의 시녀로서의 일로, 언감생심 문학을 대신한다거나 문학을 만들어낸다고 떠들어대지 못할 도장이나 속기와 같은, 아주 겸손한 시녀로서의 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 샤를 보들레르 ‘근대 대중과 사진’
요렇게 말한 보들레르는 아마 철저히 기술적인 사진 앞에 앉는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그리고 그 기술적 사진 안에서 우리는 보들레르만의 개성.을 읽어냅니다. 아, 보들레르가 죽을 때까지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후기에는 사진의 예술성에 대해 긍정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나다르의 스튜디오. 나다르.라는 간판 보이시지요?
나다르의 사진은 당대에 이미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여러 명사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섰고, 나다르는 대형 스튜디오를 차렸다지요. 그 스튜디오는 기업형으로 운영되었다고 하는데, 촬영과 정리, 암실 작업 등이 모두 분업화되었다고 합니다. 나다르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사진들 중에 나다르가 셔터 누르지 않은 것도 많다는군요. 다만 그는 사진 촬영을 감독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했겠지요. 인물을 파악하고, 인물에 맞는 조건을 만들었을 테니까요. 요즘으로 치면 예술총감독. 요건 중국식 단어군요. 아트디렉터. 요건 영어고요. 흠, 괜찮은 한국어 없나요?
나다르가 초상사진을 찍던 무렵에는 사진을 촬영하는데 제법 긴 노출시간이 필요했던 무렵입니다. 정확히 그 때 얼마나 걸려서 찍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수 초에서 길게는 수 십 초에 이르렀겠지요. 그래서 또 생각해야할 부분은 사진의 힘과 모델의 힘입니다. 긴 노출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순간적인 스냅을 찍기는 어려웠고요. 완벽하게 계산된 앵글 속에서 모델은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필름에 충분한 상이 맺힐 때까지 정지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남아있는 나다르의 사진들 속 인물은 쟁쟁한 사람들이 많지요. 나다르가 창조해 내기 이전부터 내면에 충만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진들이 인물의 아우라를 펼쳐내는 것은 사진가의 힘이라기 보다는 걸출한 모델들의 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새로운 앵글을 시도하고, 초상화를 흉내내는 초상사진이 아니라 초상화와 차별되는 초상사진을 이끈 나다르의 능력을 낮추어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사진가로서의 나다르의 능력은 어쩌면 일부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기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공중사진을 찍기도 했고, 파리의 하수도를 기록하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진의 가능성에 대해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어쩌면 또 모르지요. 미래에서 왔을지.흠. 여기는 살짝 눈 흘기는 이모티콘이라도 쓰고 싶군요.
오늘날에 보아도 나다르의 사진은 초상사진의 어떤 표준처럼 보입니다. 많은 포트레이트 작가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인물상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인물사진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프레임의 한계는 엄연하니까요. 그 출발점에 있는 사진가, 나다르입니다.
나다르가 찍은 더 많은 사진은, 구글에서 나다르.를 검색하세요.
0901 첫째 주.
- 사진은 구글에서 펐습니다.
- 인용한 보들레르의 글은 김우룡, 사진과 텍스트, 2006, 눈빛. 에서 빼왔습니다.
나다르 Nadar (Gaspard-Félix Tournachon)
이 사람이 나다르네요.
나다르를 처음 소개하는 이유는, 1. 그가 사진의 시작점에 가까이 있고, 2. 초상사진에 있어서 나다르가 그은 한 획.이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나다르와 초상사진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를 참고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여기 누르세요
1839년 프랑스 의회는 다게르의 사진 기술을 구입하고, 사진에 대한 특허권을 인정합니다. 사진의 탄생.입니다. 여러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나다르는 1820년에 파리 또는 리옹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1910년까지 살았군요. 그러니까 사진이 공식적 탄생은 나다르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사진이 얼마나 빠르게 전파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알려진 대로, 당시는 신흥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한 시기였고, 초상사진에 대한 수요가 많았습니다. 초상화는 그 제작의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여전히 귀족의 소유물이었는데 반해, 사진은 보다 쉽고 싸게 제작할 수 있어서 신흥 부르주아들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기사에 아들 부시가 퇴임을 앞두고 백악관에 걸릴 그의 초상 앞에서 사진을 찍은 내용이 났었지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퇴임 후 한 장의 초상화로 청와대에 남습니다. 사진이 보편화 된 후, 사진이 담지 못 하는 내면을 담기 위해 초상화를 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사실 누구나 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니까, 뭔가 다르게 그림으로 남기려는 것이겠지요. 초상사진은 아직 초상화의 권위를 완전히 얻지 못 한 모양입니다. 곁가지로, 발터 벤야민의 문장 속에서 초상화와 초상사진의 차이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벤야민은 그의 글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속에서 작품의 아우라는 그 유일성에 기초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복제가 있다고 해도 원본의 아우라를 흉내 낼 수는 없다는 말인데요. 문제는 사진의 경우 유일한 원본을 주장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벤야민은 사진 등의 복제예술에서 예술의 가치는 그 유일성 대신 전시성.으로 대체된다고 말합니다. 뭐 그 뒤에는 정치성으로 나가기도 하는데 거기까진 다룰 필요가 없겠지요. 어쨌든, 초기 초상사진은 사진의 저변을 확대하고 또 발전을 이끄는데 많은 기여를 합니다. 위 링크에도 나오지만, 초상사진은 초기부터 상업화됩니다. 많은 수요가 있었으니 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요. 특히 귀족을 흉내내려는 신흥 부르주아들은 그럴듯한 배경 앞에 비슷하게 서서 비슷한 사진을 찍었습니다. “자, 서세요. 팡! 다음, 더세요. 팡! 다음?” 뭐 이런 식이었겠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들은 사람들의 지갑 속에 간직되거나 집 거실에 놓였을 텐데, 결국 다 비슷비슷했겠지요. 얼굴 윤곽을 빼면 말입니다. 상업사진가와 예술가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고 어려운 겁니다. 시작부터 상업사진을 의도한다면 할 말 없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내가 찍는 것인지 카메라가 찍는 것인지 고민하는 단계를 거치는 것 같습니다. 돈 버는 기계에 기댈 것인가? 돈은 우선 접고 나만의 카메라를 부릴 것인가? 나다르는 복사기처럼 찍어내는 이 사진들이 맘에 안 들었나 봅니다.
나다르가 태어나면서부터 카메라를 손에 들고 나온 건 아니었습니다. 사진 발명보다 더 일찍 태어났다니까요. 사진가 이전에 나다르는 캐리커쳐를 그리는 만화가였다고 합니다. 여러 신문에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캐리커쳐는 단시간 내에 피사체의 특징만을 부각시켜내는 작업입니다. 순식간에 대상의 특징을 파악하는 능력이 충분히 배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을, 나다르는 그의 사진에 접목시킵니다. 그럴듯한, 그러나 실제로는 천편일률적인 배경 대신에 최대한 단순한 배경을 쓰고, 해당 인물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포즈와 표정, 그리고 그에 걸맞은 빛을 만듭니다. 물론 주로 자연광을 썼겠지요. 상상이 되지요? 질감이 거친, 어두운 색의 천을 배경으로 걸고 그 앞에 앉은 모델. 물론 한 쪽에서는 넓은 창문으로 오후 빛이 들어오겠지요. 아마 북쪽의 광원을 쓰지 않았을까요? 기존의 엄격한 사진과 달리, 나다르의 사진 속에서 인물들은 조금 더 부드러운 선을 갖고, 또 편안하거나 개성적인 자세로 있습니다. 그것이 나다르의 사진을 특별하게 만들고, 그런 장면을 만든 나다르를 시대의 사진가로 기억하게 합니다.
사진이 복제시대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유일성에 대한 동경은 여전했습니다. 지금도 변함 없잖아요? 나다르의 사진은 그 유일성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남들에게 없는 유일한 특징. 이걸 개성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그 유별남을 나다르의 사진은 담아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당대의 많은 인물들이 나다르의 작업실로 와서 그의 카메라 앞에 섭니다. 들라크루아, 마네, 알퐁스 도데 등등.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아이러니한 인물은 보들레르.겠지요. 악의꽃.이라는 시로 현대시의 시작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보들레르는 시인이기 전에 당대의 평론가였습니다. 그는 특히 사진에 대해 비판적이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술이 되려는 사진의 건방짐’에 대해 비판적이었지요. 사진은 오로지 기술적인 발명이니까 괜히 어줍잖게 예술의 지위를 노리지 마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책을 좀 뒤져 볼까요?
나다르가 찍은 보들레르입니다.
…… 카니발 때의 백정이나 세탁부처럼 차려입고, 사진 촬영에 필요한 시간만큼 표정을 찡그려 주기를 요청받으면서 선남선녀들이 마치 한 무리의 불한당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고대의 비극적이고 매력적인 장면들을 재현할 수 있다고 실제로 믿고 있었습니다. 줏대 있는 작가라면, 대중 속에서 천박하게 널리 퍼져 가던 역사와 회화에 대한 혐오와, 그에 따라 신성한 예술인 회화와 고양된 예술인 연극을 동시에 손상시키는, 이중의 신성모독죄를 목격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사진산업이 게을러서 작업을 완성할 수 없는 화가나 재주 없는 화가들의 피난처가 되면서,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달아오른 열광은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심취의 양상을 띨 뿐 아니라 복수의 측면도 갖게 되었습니다. …… 예술적 행위의 어떤 부문에서 사진으로 하여금 예술을 대신하게 하면, 사진은 자신의 동맹군이라 할 어리석은 대중의 힘ㅇ르 빌어서 오래지 않아 예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예술을 망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진은 마땅히 자신의 원래의 역할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술과 과학의 시녀로서의 일로, 언감생심 문학을 대신한다거나 문학을 만들어낸다고 떠들어대지 못할 도장이나 속기와 같은, 아주 겸손한 시녀로서의 일로 돌아가야 합니다. - 샤를 보들레르 ‘근대 대중과 사진’
요렇게 말한 보들레르는 아마 철저히 기술적인 사진 앞에 앉는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그리고 그 기술적 사진 안에서 우리는 보들레르만의 개성.을 읽어냅니다. 아, 보들레르가 죽을 때까지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후기에는 사진의 예술성에 대해 긍정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나다르의 스튜디오. 나다르.라는 간판 보이시지요?
나다르의 사진은 당대에 이미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여러 명사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섰고, 나다르는 대형 스튜디오를 차렸다지요. 그 스튜디오는 기업형으로 운영되었다고 하는데, 촬영과 정리, 암실 작업 등이 모두 분업화되었다고 합니다. 나다르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사진들 중에 나다르가 셔터 누르지 않은 것도 많다는군요. 다만 그는 사진 촬영을 감독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했겠지요. 인물을 파악하고, 인물에 맞는 조건을 만들었을 테니까요. 요즘으로 치면 예술총감독. 요건 중국식 단어군요. 아트디렉터. 요건 영어고요. 흠, 괜찮은 한국어 없나요?
나다르가 초상사진을 찍던 무렵에는 사진을 촬영하는데 제법 긴 노출시간이 필요했던 무렵입니다. 정확히 그 때 얼마나 걸려서 찍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수 초에서 길게는 수 십 초에 이르렀겠지요. 그래서 또 생각해야할 부분은 사진의 힘과 모델의 힘입니다. 긴 노출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순간적인 스냅을 찍기는 어려웠고요. 완벽하게 계산된 앵글 속에서 모델은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필름에 충분한 상이 맺힐 때까지 정지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남아있는 나다르의 사진들 속 인물은 쟁쟁한 사람들이 많지요. 나다르가 창조해 내기 이전부터 내면에 충만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진들이 인물의 아우라를 펼쳐내는 것은 사진가의 힘이라기 보다는 걸출한 모델들의 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새로운 앵글을 시도하고, 초상화를 흉내내는 초상사진이 아니라 초상화와 차별되는 초상사진을 이끈 나다르의 능력을 낮추어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사진가로서의 나다르의 능력은 어쩌면 일부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기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공중사진을 찍기도 했고, 파리의 하수도를 기록하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진의 가능성에 대해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어쩌면 또 모르지요. 미래에서 왔을지.흠. 여기는 살짝 눈 흘기는 이모티콘이라도 쓰고 싶군요.
오늘날에 보아도 나다르의 사진은 초상사진의 어떤 표준처럼 보입니다. 많은 포트레이트 작가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인물상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인물사진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프레임의 한계는 엄연하니까요. 그 출발점에 있는 사진가, 나다르입니다.
나다르가 찍은 더 많은 사진은, 구글에서 나다르.를 검색하세요.
0901 첫째 주.
- 사진은 구글에서 펐습니다.
- 인용한 보들레르의 글은 김우룡, 사진과 텍스트, 2006, 눈빛. 에서 빼왔습니다.
장진 희곡집 시나리오집
장진 희곡집 장진 / 열음사 / 초판 1쇄본 2008. 1. 15
장진 시나리오집 /장진 / 열음사 / 초반 1쇄본 2008. 7. 10
연극의 경우, 무대 위에서 발산되는 맥베스의 아우라와 배우의 아우라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분리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화 촬영의 특성은 관객의 자리를 카메라가 대체한다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배우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소실되어 버리고 그와 함께 배역의 아우라 역시 사라져 버린다. …… 연극배우는 배역의 성격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영화배우의 경우 이런 동일시의 기회는 거의 부정당한다. – 발터 벤야민,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예술의 각 장르는 그 마다의 문법을 갖는다. 현대예술은 보이지 않은 것, 말할 수 없는 것, 말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려는 듯하다. 다른 장르와 구분되는 영화만의 문법은 무엇일까? 소설이어도 되고 연극이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아니면 안 되는, 그래서 꼭 영화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진.은 제법 잘 나가는 연극 연출가이고 또 영화감독이고 또 시나리오 작가다. 배우도 하던가? 그가 만든 영화에는 장진스러움.이 잘 드러난다. 영화가 왜 꼭 영화라는 형식을 빌어야 하는 것일까? 그 내용을 글로 써 두면 안 되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장진의 영화는 그럴 듯한 답을 전하고 있다. 팀 버튼 감독이나 워쇼스키 형제쯤 되면 그들의 문법은 참 영화스러워서 다른 장르로 옮겨보려고 해도 쉽지 않다. 영상의 힘이고 또 영화라는 틀에 잘 들어맞는 이야기의 힘이다. ‘아는 여자’를 보며 더욱 크게 느낀 장진.스러움 역시 영화만의 문법을 잘 적용시킨 것으로 보였다. 연극판에서 단련된 이야기의 힘, 리듬을 타는 능력이 빚어낸 결과라고 본다. 전봇대를 타고 전기 위에 실려 전해지는 사랑.을 누가 상상했을까? 그게 소설이라면, 그게 사진이라면, 음악이라면, 행위예술이라면, 설치미술이라면?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장황하게 쓰는 것은, 사실 그 확연함이 정말 확연한 것인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극과의 차이라면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영화라는 예술이 처음 등장한 무렵 발터 벤야민은 영화와 구분되는 연극의 힘을 위와 같이 썼다. 그의 글이 연극에 대한 일방적 찬양이거나 영화에 대한 비판인 것은 아니고, 다만 연극을 변호하는, 연극을 본 적 없고 연극을 멀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연극의 힘을 멀게나마 전해줄 수 있는 문장이어서 옮겨 왔다. 나도 제대로 연극을 본 적이 없다. 무대의 현장성이라고 하면 되나? 그리고 배우의 호흡이 닿는 가까운 거리라고 하면 되나?
시나리오집에는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소나기는 그쳤나요?, 고마운 사람, 거룩한 계보, 아들, 공공의 적 1-1: 강철중. 모두 7편의 영화 대본이 실려 있고, 희곡집에는 아름다운 사인, 박수 칠 때 떠나라, 택시 드리벌, 웰컴 투 동막골, 서툰 사람들.까지 5편의 연극 대본이 실려 있다. 시나리오집에 있는 것들 중에는 단편 2편을 제외하면 모두 영화로 본 것들이고, 희곡집에 있는 것들 중 박수 칠 때 떠나라.와 웰컴 투 동막골은 영화화 되어서 또 본 것들이다. 이미 본 영화는 대본 사이사이가 모두 장면으로 떠올라서 상상의 공간이 적었고, 아직 보지 않은 희곡들은 연극에 서툰 나로서 어떤 무대도 그려낼 수 없었다. 이야기를 현실에 들러붙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사이마다 치고 빠지는 위트를 기발하게 구사하는 대본들은 따로 떨어져 있어도 통째 하나의 작품인 것처럼 닮은 색깔을 낸다.
다른 생을 살게 된다면, 연극 배우는 한 번 겪어보고 싶은 직업이다. 무대 위의 배우도 멋지고, 배우를 움직이게 하는 글을 쓰는 일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2009년 1월 1일 목요일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읽은 책에 대한 후기를 제대로 정리하기 시작한 때는 군대에 있던 무렵이었다. 중반 이후에는 워낙 할 일이 없었으니까, 4층에 있는 경목실에 가서 책을 빌려 읽고, 읽은 책의 후기를 모으는 작은 카페를 열었었다. 잊은 지 오래 되었다. 사이트 주소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 때 쓴 문장들을 다시 보면 참 부끄럽겠다. 애써 다시 찾지 말아야겠다.
유학생들에 대한 책임감은 항상 느끼는 부분이다. 에너지가 있는 사람은 저 혼자 잘나서된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조금씩 빌려주어서, 그렇게 조금씩 빌려와서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에너지를 갖는다고 믿는다. 그러면 그 에너지를 써서 성장하고, 성장한 후에는, 또는 성장하는 중에라도 다시 주변으로 내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가진 자의 마땅한 의무다. 개인적으로 대학생활을 통해 내가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교수님들이 계셨고 또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재미있는 공부도 있었다. 중국의 유학생들을 볼 때 그들이 누리지 못 하는 대학생활의 깊이가 언제나 아쉬웠다. 대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고민들, 대학생이라면 읽어 보아야 할 책들을 아무도 일러주는 사람이 없다. 풍성한 길로 끌어주는 사람도 없다. 대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이제 행동으로 옮길 때다. 대학생활을 통해 내가 받은 혜택을 이 곳의 학생들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책 읽는 모임을 만들자는 소식을 듣고 얼른 동참했다. 그리고 첫 모임에서 유학생들을 참여시키자고 말했다. 유학생 사이트 두 곳에 관련 공지를 올렸고, 오늘까지 네 통의 메일을 받았다. 메일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부족함에 대해 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하고 싶다고 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성장을 확신한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책 읽기 모임이 처음으로 선정한 책이다. 시간에 맞춰 책을 구할 수 없어서 제본해 읽었다.
국방부는 왜 이 책을 불온서적으로 정했을까? 책을 광고하려는 지능적 안티였을까? 표면적으로 읽자면 반미를 선동하는 책이라는 것이 그 이유일 텐데, 이 정부 하는 일이 대부분 그렇듯이 웃기는 작태다.
장하준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가 외치는 논리의 허구성을 실증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철저기 깬다. 책 읽으며 중간중간 정리하지 않고 다 읽은 후 감상문식으로 쓰려니 대충의 얼개만 기억날 뿐 세세한 내용들은 흐리다.
안재흥 선생님은 세계화에 대해 강의하실 때 국제화와 세계화를 구분하셨는데, 국제화는 여전히 국가를 그 행위 주체로 보고, 세계화는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움직임으로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세계화에 대한 책이기보다는 국제화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야 옳다. 국민국가 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국민국가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얼른 그 시대가 마감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앞으로 제법 긴 시간 동안 국민국가를 국제관계의 행위 주체로 설정하려는 모양이다. 장하준의 논리 전개는 국민국가를 그 중심에 둔다.
그리고 경제 논리로 정치를 덮는 방식은 위험해 보였다. 경제 발전을 위해 일정 부분의 부정부패를 용인한다는 발상은 정치로 옮겨가면 전 국가의 부패를 불러오고 정의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 우리는 이미 그 현장을 목격하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 책은 개발도상국들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적극적인 자국 중심의 경제를 운영하거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개과천선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분명한 힘의 논리 속에서 전자는 쉽지 않아 보이고,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 자본의 속성상 후자도 만만찮아 보인다.
책 중간에 내 메모는 대부분
“명박아……”
“그런데 명박이는……” 하는 식이었다.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알고 있어야겠다. 언젠가 때가 올지 모르니까.
게으른 반군.
멋대로 감상.
장하준
읽은 책에 대한 후기를 제대로 정리하기 시작한 때는 군대에 있던 무렵이었다. 중반 이후에는 워낙 할 일이 없었으니까, 4층에 있는 경목실에 가서 책을 빌려 읽고, 읽은 책의 후기를 모으는 작은 카페를 열었었다. 잊은 지 오래 되었다. 사이트 주소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 때 쓴 문장들을 다시 보면 참 부끄럽겠다. 애써 다시 찾지 말아야겠다.
유학생들에 대한 책임감은 항상 느끼는 부분이다. 에너지가 있는 사람은 저 혼자 잘나서된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조금씩 빌려주어서, 그렇게 조금씩 빌려와서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에너지를 갖는다고 믿는다. 그러면 그 에너지를 써서 성장하고, 성장한 후에는, 또는 성장하는 중에라도 다시 주변으로 내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가진 자의 마땅한 의무다. 개인적으로 대학생활을 통해 내가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교수님들이 계셨고 또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재미있는 공부도 있었다. 중국의 유학생들을 볼 때 그들이 누리지 못 하는 대학생활의 깊이가 언제나 아쉬웠다. 대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고민들, 대학생이라면 읽어 보아야 할 책들을 아무도 일러주는 사람이 없다. 풍성한 길로 끌어주는 사람도 없다. 대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이제 행동으로 옮길 때다. 대학생활을 통해 내가 받은 혜택을 이 곳의 학생들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책 읽는 모임을 만들자는 소식을 듣고 얼른 동참했다. 그리고 첫 모임에서 유학생들을 참여시키자고 말했다. 유학생 사이트 두 곳에 관련 공지를 올렸고, 오늘까지 네 통의 메일을 받았다. 메일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부족함에 대해 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하고 싶다고 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성장을 확신한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책 읽기 모임이 처음으로 선정한 책이다. 시간에 맞춰 책을 구할 수 없어서 제본해 읽었다.
국방부는 왜 이 책을 불온서적으로 정했을까? 책을 광고하려는 지능적 안티였을까? 표면적으로 읽자면 반미를 선동하는 책이라는 것이 그 이유일 텐데, 이 정부 하는 일이 대부분 그렇듯이 웃기는 작태다.
장하준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가 외치는 논리의 허구성을 실증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철저기 깬다. 책 읽으며 중간중간 정리하지 않고 다 읽은 후 감상문식으로 쓰려니 대충의 얼개만 기억날 뿐 세세한 내용들은 흐리다.
안재흥 선생님은 세계화에 대해 강의하실 때 국제화와 세계화를 구분하셨는데, 국제화는 여전히 국가를 그 행위 주체로 보고, 세계화는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움직임으로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세계화에 대한 책이기보다는 국제화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야 옳다. 국민국가 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국민국가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얼른 그 시대가 마감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앞으로 제법 긴 시간 동안 국민국가를 국제관계의 행위 주체로 설정하려는 모양이다. 장하준의 논리 전개는 국민국가를 그 중심에 둔다.
그리고 경제 논리로 정치를 덮는 방식은 위험해 보였다. 경제 발전을 위해 일정 부분의 부정부패를 용인한다는 발상은 정치로 옮겨가면 전 국가의 부패를 불러오고 정의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 우리는 이미 그 현장을 목격하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 책은 개발도상국들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적극적인 자국 중심의 경제를 운영하거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개과천선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분명한 힘의 논리 속에서 전자는 쉽지 않아 보이고,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 자본의 속성상 후자도 만만찮아 보인다.
책 중간에 내 메모는 대부분
“명박아……”
“그런데 명박이는……” 하는 식이었다.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알고 있어야겠다. 언젠가 때가 올지 모르니까.
게으른 반군.
멋대로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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