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4일 목요일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고재종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 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다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대잎은 시퍼렇게 치솟아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그러니까
우리 정녕 강길을 따라 거닐며
그 윤기나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던
날들은 기어이, 기어이는 오지 않아서
강물에 뱉은 쓴 약의 시간들은 저기 저렇게
새까만 암죽으로 끓어서 강줄기를 막는
것인가.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 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대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낱 같은 흰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말이 너무 많아서 쓰러질 듯이 지쳤을 때 시 읽는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읽으니, 전에 안 보이던 것도 보인다. 아마 그 때는 보았는데 지금은 안 보이는 것도 있을 터이다. 생각 없이 꺼낸 시집 안에는 내가 한국을 떠나오던 무렵에 고은이가 썼던 편지가 끼워져 있다. 전에도 몇 번 보았던 것 같은데, 어쩐지 이 시집 사이가 그 편지의 자리인 듯해서 옮겨두지 않았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여전히 가장 위태롭고 단단한 사람쯤 되는 고은이는 아마 그 녀석의 속내를 닮게 될 딸아이와 함께 영국에 산다. 편지 속에서,

"당신도, 나도, 건승합시다. 최소한, 비겁하게, 가고 싶은 길에서 가야할 길에서 도망치지는 않도록 합시다. 재회 때까지 건강하세요."라고 쓰고 있다.

이번 작업이 끝나면, 어디 짧은 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다. 두 바퀴 자전거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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