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에 대한 책임. 내가 대학생활을 통해 많이 성장했으니, 그런 기회가 상대적으로 드문 이 곳 유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어떤 막연한 책임감 같은 것. 건너 건너 알게된 유학생들이 잡지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 중에 깨어있다고 스스로 아는 몇몇이 모여서 자신들이 속한 유학생 사회에 어떤 자극을 주고 싶다고 뜻을 모았다. 좋은 뜻으로 뭉쳤으니 잘 하라고 그저 마음만 보태며 있었는데, 얼마 전에 만났을 때 처음으로 걱정이 됐다. 든든하게만 보이던 친구였는데, 지친 모습이 안타까웠고 저러다가 제풀에 쓰러지면 그 좋은 시도가 빛을 보지 못 하고 무너지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그런 시도를 했던 팀에게도 아쉬움으로 남겠지만 그것보다 큰 것은 그 시도를 통해 어쩌면 자극을 받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알게 될 더 많은 유학생들이 안타까울 것이다. 강건너 불구경이나 하고 뒷방 늙은이처럼 괜히 잔소리나 보태려던 마음을 바꿔서 조금 나서서 돕기로 했다.
발간 일정을 앞둔 잡지라고 하기에는 준비라고 해 둔 것이 없었다. 우선 급한대로 다시 회의를 통해 구성을 잡고 아는 잡지사로 가서 편집에 필요한 디자인툴을 얻어왔다.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 툴에 대한 안내 서적도 거의 빼앗듯이 가져왔다. 잡지의 핵심이 되는 디자인 서식도 얻어 왔다. 선듯 내어준 마음이 고맙다. 팔자에 없는 편집 디자인을 공부하게 생겼다. 모자란 기사를 몇 개 써주기로 하고 기존 원고에 대한 교정 이상의 수정 작업을 해주기로 했다.
학생들이 하는 작업에 끼어드는 것이 못내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다. 그 때는 나도 그랬을까? 하는 것마다 서툴러 보이고 온갖 틈만 보인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나도 만들어졌을 테니까 그들의 지금도 긍정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러기엔 그들이 잡아둔 일정은 촉박하고 해 놓은 것은 성글다. 급한 마음으로 몰아치고 안 되는 부분은 내가 떠안기로 한다.
마음이 불편하다. 내 부족함을 내가 잘 아는데 그 부족한 모습으로 저 당당한 아이들을 몰아치고 있으니 무엇인가 속이는 기분이고, 회의 끝내고 아이들 돌려보내고 나면 방 안에는 쇳소리만 여운처럼 남고 녹슬어가는 쇳조각 비린내만 난다. 급한 마음에 말이 너무 많아서 미처 생각으로 채우지 못 한 성근 말들이 난무한다. 쫓기는 마음은 저들의 상황을 깊이 헤아리지 못 하고 내 기준에 맞추어서 닥달만 한다. 내가 관여하기 훨씬 전부터 저들끼리 공들여 만든 결과물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자꾸만 그들 기를 죽이는 것 같아서 내 말에도 자신이 없다. 그들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잡지에 대한 자부심 대신, 부족한 것들만 모여서 어설픈 미완성 밖에 얻어낸 것이 없다는 감상을 갖게 할까 무섭다.
친구들, 선생님 생각이 간절하다. 내 부족함을 바닥까지 깨부수며 범접하기 어려운 높이의 지식으로 강의해주시던 교수님들이 간절하다. 선생님들의 지식에 대한 의심 없이 참 편하게 많은 것을 배웠다. 의심 따위 우습다는 듯, 이미 수 많은 의심에 대한 승전 기록을 보여주시듯 선생님들의 배움은 깊고 단단했다. 그 말본새 하나하나, 그 몸가짐 하나하나는 또 얼마나 멋드러졌던가.
몇 명만 뭉쳐두면 이 정도 잡지쯤은 놀이처럼 해치우고 시원하게 맥주 한 잔 마시러 갈 수 있는 친구들이 간절하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못 해낼 것이 없어 보였다. 서로가 서로의 능력에 대해 신뢰했고, 자신들의 자리에서 언제나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들고 나타나는 그들의 등장은 참 든든했었다. 함께 모일 때 산술적 합 이상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했고, 그들은 한 번도 기대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며칠의 취재와 며칠의 디자인 기간이 끝나면, 어쨌든 잡지라는 형태가 나올 것이다. 이번 작업이 끝나면 나는 팽.당해야 한다. 내가 팀에 있는 게 이 친구들에게 별로 이로운 일이 아닐 듯하다. 대학생으로 팀을 꾸려 그들의 내부적 성장과 외부에 대한 자극을 의도한 것이니까, 그렇게 가게 해야겠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에 나는 되도록 많은 것을 보여주어야겠다. 다음 번 작업에는 그들이 더 나은 곳에 닿을 수 있도록 하고, 무엇보다 겨우 나 정도의 수준에 만족하지 말기를 당부해야겠다. 든든하고 아름다웠던, 일당백 친구들의 전설을 전해주어야겠다. 깊은 바다같았던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전해야겠다.
작업을 진행할 수록 내 부족함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번 일 끝나면 입 좀 닫아야겠다. 말 좀 줄이고, 부족한 내 공부나 좀 더 채워야겠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한 에프상하이 사진스터디도 슬슬 끝이 보이니까, 사이트 활동도 좀 줄이고 새로 책공부하는 작은 모임이나 꾸려 보아야겠다. 사회인의 신분으로 학생들 작업에 끼어드는 것이 어색했는데, 생각해 보니 내 마음은 한 번도 학생이 아닌 적이 없었다. 선생님 따라가다가 혼자 길 잃고 우는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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