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맹인 연주자 앞에서 사진을 묻다
2. 옥탑방 작업실에 사는 물고기
3. 예술가, 그 발칙한 이름
4. 강, 도시의 시작
5. 낡은 가을 오후의 산책
6. 상하이를 상하이답게 하기
7. 즈멍의 골목길
8. 여행, 길의 끝에서
시작합니다.
2009년 4월 19일 일요일
2009년 4월 18일 토요일
왼쪽 손바닥이 나갔다. 어제 운동 다녀와서 제법 큰 물집이 잡혔다. 일 때문에 밀려서 겨우 열흘 만에 운동을 갔더니 겨우 자리잡기 시작했던 손바닥 굳은살이 그 사이 풀려나고 있었던 모양이고, 지난 운동 때 깨먹은 죽도 때문에 새 죽도로 바꿨더니 손잡이 부분이 아직 거칠었던 모양이다. 이번 물집은 제법 커서, 가만 두면 다음 운동 때 더 문제가 될 것 같았다. 얼른 새 살 돋으라고 물집 잡힌 부분을 걷어냈다. 쓰라린다. 샴푸할 때 내가 왼손 바닥에 샴푸를 받는다는 걸 오늘 아침에 처음 알았다. 한 손으로 머리 감고 한 손으로 로션 바르니 왼손 바닥이 막 그립다. 키보드에 손을 얹을 때도 왼손 바닥이 아랫부분에 닿는다는 걸 또 처음 알았다. 새 살이 돋고, 다시 벗겨지는 일을 두어 번 더 반복해야 손바닥은 단단하게 버텨둘 거다. 그 동안에는 조심해서 써야 한다. 책 속에서, 모리 교수는 상처입은 제자에게 어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상처의 바닥까지 내려가라고 말한다. 바닥에 닿으면 자연스럽게 바닥을 박차고 오를 수 있으니까, 애써 바둥거리지 말라고 일러 주신다. 나는 마음 급한 어린이니까, 얼른 떼어내고 새 살 돋으라고 아직 덜 아문 피부를 공기 중에 드러내고 만다. 이 정도는 버틸 만하다고 마냥 혼자 믿으면서.
아침에 인터넷에서 본 글 중에, 낙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낙타는 사람과 함께 사막을 건널 때, 힘든 내색을 잘 안 한다고 한다. 묵묵히 걷고, 든든하게 걷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때가 오면,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죽는다고 했다. 그리고 글은, 그런 낙타의 행위를 배신이라고 쓰고 있었다. 낙타 혼자 가는 길이었다면 그런 묵묵한 실천이 미덕이겠지만, 다른 존재와 동행하는 길이기 때문에, 배신이라고 했다. 일방적 헌신이 미덕이 될 수 없는 관계가 동행이겠구나 싶었다. 내어줄 부분을 내어주고 받아줄 부분을 받아주는 연습도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모나님은 언젠가 내게 그런 충고를 했는데, 상대방의 호의를 받아주는 것도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신세 지는 일에 서툰 반군은 밉지 않게 부탁하고 또 신세 지는 사람들 보면 그것도 참 좋은 재능인 듯해서 부럽다.
생각에 머물러 있던 일 몇 개를 진행시켜야겠다는 다짐. 더 미룰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일에 떠밀리고 쫓기기 전에, 내가 일을 몰아 가야한다는 다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애써 지우고, 가능한 상황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한다는 자각. 그리고 아주 많이 늦기 전에, 꼭 야구장 응원을 가 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
아침에 인터넷에서 본 글 중에, 낙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낙타는 사람과 함께 사막을 건널 때, 힘든 내색을 잘 안 한다고 한다. 묵묵히 걷고, 든든하게 걷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때가 오면,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죽는다고 했다. 그리고 글은, 그런 낙타의 행위를 배신이라고 쓰고 있었다. 낙타 혼자 가는 길이었다면 그런 묵묵한 실천이 미덕이겠지만, 다른 존재와 동행하는 길이기 때문에, 배신이라고 했다. 일방적 헌신이 미덕이 될 수 없는 관계가 동행이겠구나 싶었다. 내어줄 부분을 내어주고 받아줄 부분을 받아주는 연습도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모나님은 언젠가 내게 그런 충고를 했는데, 상대방의 호의를 받아주는 것도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신세 지는 일에 서툰 반군은 밉지 않게 부탁하고 또 신세 지는 사람들 보면 그것도 참 좋은 재능인 듯해서 부럽다.
생각에 머물러 있던 일 몇 개를 진행시켜야겠다는 다짐. 더 미룰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일에 떠밀리고 쫓기기 전에, 내가 일을 몰아 가야한다는 다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애써 지우고, 가능한 상황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한다는 자각. 그리고 아주 많이 늦기 전에, 꼭 야구장 응원을 가 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
2009년 4월 17일 금요일
엄마가 섬그늘에
乍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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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한가로운 어촌 풍경이 그려지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낮은 돌담장이 바닷가를 향해 열린 작은 집, 나무판을 끼워 만든 마룻바닥에 곱게 누운 아기를 상상한다. 그 아기에게 불어오는 바닷가 봄바람 같은 풍경들.
어촌이라는 단어를 바닷가와 동일시할 수 없는 시대에 산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의 해안선은 컨테이너 부두가 들어섰고 콘크리트로 말끔하게 마감한 부둣가에 육중한 화물선들이 정박했다. 도시의 바다에는 ‘漁’도 없고 ‘村’도 없다. 가끔, 바다의 너른 품이 아쉬울 때가 있다. 끝 간 데 없는 그 풍경 앞에서 딱히 무엇을 보겠다거나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이 없어도, 마냥 그 앞에 서고 싶은 때가 있기는 하다. 상하이 남쪽 어느 바닷가로 가면 그 곳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있고 그물도 있고 또 생선 비린내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자전거는 어촌으로 간다.
아침 지하철에 실려 송장까지 간 자전거는 곧장 남쪽으로 가서 황포강을 건넌다. 지도 상에는 강을 경계로 도로가 끊겨있다. 막연하게 떠오르는 단어, ‘설마’. 도로는 강을 건너지 못 한 듯하지만 그래도 강의 양편 도로가 같은 이름으로 닿아 있으니 어쩌면 작은 다리라도 있지 않을까? 하다 못해 강 건너는 배라도 있지 않을까? 설마 없겠어? 내 자전거 말고도 제법 많은 탈 것들이 저 길의 끝으로 가는 듯한데, 설마 그 탈것들이 막다른 길을 향해 가는 거겠어? 설마 강변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이야 생기겠어? 설마? 근거 없는 막연한 믿음에 기대어 자전거는 계속 가 보지만, 마음 한 구석 불안함을 속일 수는 없다. 마침내 도착한 강변, 아, 작은 부두가 보이고 익히 보던 입구가 보인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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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끊고 배 타러 가는 길에 부두 콘크리트 위에서 버둥거리는 자라를 보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한낮의 콘크리트 위에 검은 몸으로 뒤척이고 있다. 곧 떠날 배를 앞에 둔 급한 마음은 얼른 집어서 강에 놓아주고 배에 올랐다. 배가 강의 가운데로 나아갈 때 돌아보니 다른 누군가 다시 자라를 집어서 물가에 놓아주고 있다. 다시 뭍으로 올라왔던 모양이다. 햇빛 내리는 그 바닥에서 검은 몸으로 빛 받고 있으면 온 몸이 끓어오를 텐데, 자라는 왜 그 뜨거운 바닥으로 다시 온 것일까?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전날 밤 기막힌 꿈이라도 꾼 것일까? 몇 번이나 놓여날 수 있을지 그 운이라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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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넌 자전거 앞으로 초록과 노란색의 바다가 펼친다. 밀인지 보리인지 알 길 없는 녹색 풀밭과 유채꽃의 밝은 노랑이 겹쳐져서 끝 간 데를 모르겠다. 초록의 냄새는 싱그럽고 노랑의 유채꽃은 여름의 풀비린내를 예비하는 알몸의 살냄새를 낮게 뿌려대고 있다.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자전거는 풀밭 가운데로 난 작은 흙길에 멈추어 선다. 혼자 헤매기 아까운 길이다. 데려와 함께 보고 싶은 사람들 얼굴이 봄풍경 위에 겹친다. 이 풍경을 혼자 독차지한다는 생각이 마냥 미안해진다.
송장에서 느릿느릿 다섯 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닿았다. 발전소 지나서 한국 민박집에 숙소를 잡고 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바다를 보러 나간다. 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 들러 다음날 아침 상하이로 돌아갈 버스표를 끊었다. 상하이 남역까지는 한 시간 반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바다의 등장은 갑작스러웠다. 멀리에서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바다가 아니고, 공원의 끝에서 불쑥 솟아오른 듯 검은 갯벌의 바다가 펼쳐진다. 눈은 검은 빛깔의 진흙을 한참 동안 밟아간 다음에야 멀리 거대한 물을 본다. 그리고 갑자기 불려 나오는 자라의 기억. 자라가 햇빛에 끓어오르는 제 몸을 부여잡고 기어 기어서 마침내 닿으려고 했던 곳이 여기는 아니었을까? 자라는, 길의 어디쯤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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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만을 돌아서 골목길을 더듬어 가면 마침내 고깃배들이 묶여있고 생선 비린내가 펼친 어촌이다. 아침부터 달려온 자전거는 선창가에 눕고 더 나아갈 수 없는 여행자도 바닷가 바위 위에 앉아 지는 해를 본다. 굵은 밧줄에 감기고 검은 진흙에 붙들린 배들은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 하고 영영 여기에 묶일 듯하다. 해가 지고 바닷물이 들어오면, 내가 보지 못 하는 밤 어느 시간에 배는 출항할 것이다. 고깃배와 그 배에 올라탄 선원들은 같은 곳으로 갈 것인데, 선원은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고 배는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뭍으로 돌아오기 위해 가고 배는 바다로 가기 위해 정박하는 듯하다.
여행이 주는 위로는 계통 없는 것이다. 길의 풍경 앞에 서고서야 비로소 내 어느 한 구석에 위로를 받아줄 틈이 있었다고 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내 안에 풍경의 위로를 받을 틈이 있었던 것일까? 바닷가에 부는 오후 바람은 편안하고 위로 받는 마음도 더불어 고요하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배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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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한가로운 어촌 풍경이 그려지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낮은 돌담장이 바닷가를 향해 열린 작은 집, 나무판을 끼워 만든 마룻바닥에 곱게 누운 아기를 상상한다. 그 아기에게 불어오는 바닷가 봄바람 같은 풍경들.
어촌이라는 단어를 바닷가와 동일시할 수 없는 시대에 산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의 해안선은 컨테이너 부두가 들어섰고 콘크리트로 말끔하게 마감한 부둣가에 육중한 화물선들이 정박했다. 도시의 바다에는 ‘漁’도 없고 ‘村’도 없다. 가끔, 바다의 너른 품이 아쉬울 때가 있다. 끝 간 데 없는 그 풍경 앞에서 딱히 무엇을 보겠다거나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이 없어도, 마냥 그 앞에 서고 싶은 때가 있기는 하다. 상하이 남쪽 어느 바닷가로 가면 그 곳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있고 그물도 있고 또 생선 비린내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자전거는 어촌으로 간다.
아침 지하철에 실려 송장까지 간 자전거는 곧장 남쪽으로 가서 황포강을 건넌다. 지도 상에는 강을 경계로 도로가 끊겨있다. 막연하게 떠오르는 단어, ‘설마’. 도로는 강을 건너지 못 한 듯하지만 그래도 강의 양편 도로가 같은 이름으로 닿아 있으니 어쩌면 작은 다리라도 있지 않을까? 하다 못해 강 건너는 배라도 있지 않을까? 설마 없겠어? 내 자전거 말고도 제법 많은 탈 것들이 저 길의 끝으로 가는 듯한데, 설마 그 탈것들이 막다른 길을 향해 가는 거겠어? 설마 강변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이야 생기겠어? 설마? 근거 없는 막연한 믿음에 기대어 자전거는 계속 가 보지만, 마음 한 구석 불안함을 속일 수는 없다. 마침내 도착한 강변, 아, 작은 부두가 보이고 익히 보던 입구가 보인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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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끊고 배 타러 가는 길에 부두 콘크리트 위에서 버둥거리는 자라를 보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한낮의 콘크리트 위에 검은 몸으로 뒤척이고 있다. 곧 떠날 배를 앞에 둔 급한 마음은 얼른 집어서 강에 놓아주고 배에 올랐다. 배가 강의 가운데로 나아갈 때 돌아보니 다른 누군가 다시 자라를 집어서 물가에 놓아주고 있다. 다시 뭍으로 올라왔던 모양이다. 햇빛 내리는 그 바닥에서 검은 몸으로 빛 받고 있으면 온 몸이 끓어오를 텐데, 자라는 왜 그 뜨거운 바닥으로 다시 온 것일까?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전날 밤 기막힌 꿈이라도 꾼 것일까? 몇 번이나 놓여날 수 있을지 그 운이라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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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넌 자전거 앞으로 초록과 노란색의 바다가 펼친다. 밀인지 보리인지 알 길 없는 녹색 풀밭과 유채꽃의 밝은 노랑이 겹쳐져서 끝 간 데를 모르겠다. 초록의 냄새는 싱그럽고 노랑의 유채꽃은 여름의 풀비린내를 예비하는 알몸의 살냄새를 낮게 뿌려대고 있다.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자전거는 풀밭 가운데로 난 작은 흙길에 멈추어 선다. 혼자 헤매기 아까운 길이다. 데려와 함께 보고 싶은 사람들 얼굴이 봄풍경 위에 겹친다. 이 풍경을 혼자 독차지한다는 생각이 마냥 미안해진다.
송장에서 느릿느릿 다섯 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닿았다. 발전소 지나서 한국 민박집에 숙소를 잡고 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바다를 보러 나간다. 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 들러 다음날 아침 상하이로 돌아갈 버스표를 끊었다. 상하이 남역까지는 한 시간 반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바다의 등장은 갑작스러웠다. 멀리에서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바다가 아니고, 공원의 끝에서 불쑥 솟아오른 듯 검은 갯벌의 바다가 펼쳐진다. 눈은 검은 빛깔의 진흙을 한참 동안 밟아간 다음에야 멀리 거대한 물을 본다. 그리고 갑자기 불려 나오는 자라의 기억. 자라가 햇빛에 끓어오르는 제 몸을 부여잡고 기어 기어서 마침내 닿으려고 했던 곳이 여기는 아니었을까? 자라는, 길의 어디쯤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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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만을 돌아서 골목길을 더듬어 가면 마침내 고깃배들이 묶여있고 생선 비린내가 펼친 어촌이다. 아침부터 달려온 자전거는 선창가에 눕고 더 나아갈 수 없는 여행자도 바닷가 바위 위에 앉아 지는 해를 본다. 굵은 밧줄에 감기고 검은 진흙에 붙들린 배들은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 하고 영영 여기에 묶일 듯하다. 해가 지고 바닷물이 들어오면, 내가 보지 못 하는 밤 어느 시간에 배는 출항할 것이다. 고깃배와 그 배에 올라탄 선원들은 같은 곳으로 갈 것인데, 선원은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고 배는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뭍으로 돌아오기 위해 가고 배는 바다로 가기 위해 정박하는 듯하다.
여행이 주는 위로는 계통 없는 것이다. 길의 풍경 앞에 서고서야 비로소 내 어느 한 구석에 위로를 받아줄 틈이 있었다고 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내 안에 풍경의 위로를 받을 틈이 있었던 것일까? 바닷가에 부는 오후 바람은 편안하고 위로 받는 마음도 더불어 고요하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배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2009년 4월 10일 금요일
바다에 다녀왔다. 바다의 등장은 갑작스러웠다.
한 달쯤 걸려서 이상에게 보낼 답장을 다 썼다. 이상은 편지마다에 책갈피를 넣어서 보내주었는데, 나는 게으르고 또 편지 봉투에 넣을 게 마땅찮아서 겨우 명함 한 장 넣었다. 명함이라... 이상이라면 명함을 명함 아니게 받아 줄 것을 안다. 편지 안에서, 몇 년째 아무 곳에도 하지 않던 칼 이야기를 다시 했다. 잊은 줄 알았다. 칼은 더 이상 어떤 화두도 아닌 줄 알았다. 내가 여전히 한 자루 칼에 기대어 있고 끝내 닿지 못 할 곳을 향해 계속 한 자루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았다. 내 안으로 가지런하기, 온 몸으로 낮아지기. 제법 좋은 칼을 갈아 가고 있구나 싶다.
나보다 어리지만 내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경훈이와는 어제 저녁을 함께 먹었다. 녀석은 와이프와 함께 먹을 술국을 아마도 삥뜯어서 갖고 온 듯하다. 같이 먹자고 소주 한 병도 갖고 왔는데, 나는 겨우 물잔으로 회답했다. 아깝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나는 중고 씨디 두 장을 사고, 편의점 와인 코너 앞에서 얼마나 망설였던가. 꼭 한 잔 하고 싶었는데, 혼자 먹으면 일 년을 먹을 것 같은 와인 앞에서 아주 오랜만에 한참 고민했다. 녀석이 그렇게 올 줄 알았다만 한 병 질러 놓을 것을. 술 한 잔이 참 고픈 날.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도 가물한,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존재마다의 탄생 때마다 저 끝에서 달려와 맺히고 폭발하는 우주와 우주의 맥박 같은 갈등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제법 몇 년 떠벌리기도 했었는데.
숫자로 따지면 분명하게 어린 효빈이는, 도대체 어떤 시간을 거쳐온 것인지 가끔씩 던지는 한 마디 속에 막강한 내공을 언듯 보이고는 한다. 저 나이에 저런 내공이라면 도대체 저 아이가 내 나이쯤 되면 어떤 말들을 하게 될까? 기대가 된다. 효빈이에게 들려준 협곡의 양편에 앉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정말 십 년은 된 것이다.
우연찮게 지난 생각의 토막들을 불러오게 되는 요즘이다. 그 때쯤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또 치기 어린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 생각의 바탕에서 이렇게 걸어온 지금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다. 나는, 자랐다.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문장을 써야 한다. 감정을 다만 소비시키고 마는 문장은 배설 외에 무엇도 안 된다. 그러면서 이런 문장들이나 쓰다니.
한 달쯤 걸려서 이상에게 보낼 답장을 다 썼다. 이상은 편지마다에 책갈피를 넣어서 보내주었는데, 나는 게으르고 또 편지 봉투에 넣을 게 마땅찮아서 겨우 명함 한 장 넣었다. 명함이라... 이상이라면 명함을 명함 아니게 받아 줄 것을 안다. 편지 안에서, 몇 년째 아무 곳에도 하지 않던 칼 이야기를 다시 했다. 잊은 줄 알았다. 칼은 더 이상 어떤 화두도 아닌 줄 알았다. 내가 여전히 한 자루 칼에 기대어 있고 끝내 닿지 못 할 곳을 향해 계속 한 자루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았다. 내 안으로 가지런하기, 온 몸으로 낮아지기. 제법 좋은 칼을 갈아 가고 있구나 싶다.
나보다 어리지만 내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경훈이와는 어제 저녁을 함께 먹었다. 녀석은 와이프와 함께 먹을 술국을 아마도 삥뜯어서 갖고 온 듯하다. 같이 먹자고 소주 한 병도 갖고 왔는데, 나는 겨우 물잔으로 회답했다. 아깝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나는 중고 씨디 두 장을 사고, 편의점 와인 코너 앞에서 얼마나 망설였던가. 꼭 한 잔 하고 싶었는데, 혼자 먹으면 일 년을 먹을 것 같은 와인 앞에서 아주 오랜만에 한참 고민했다. 녀석이 그렇게 올 줄 알았다만 한 병 질러 놓을 것을. 술 한 잔이 참 고픈 날.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도 가물한,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존재마다의 탄생 때마다 저 끝에서 달려와 맺히고 폭발하는 우주와 우주의 맥박 같은 갈등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제법 몇 년 떠벌리기도 했었는데.
숫자로 따지면 분명하게 어린 효빈이는, 도대체 어떤 시간을 거쳐온 것인지 가끔씩 던지는 한 마디 속에 막강한 내공을 언듯 보이고는 한다. 저 나이에 저런 내공이라면 도대체 저 아이가 내 나이쯤 되면 어떤 말들을 하게 될까? 기대가 된다. 효빈이에게 들려준 협곡의 양편에 앉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정말 십 년은 된 것이다.
우연찮게 지난 생각의 토막들을 불러오게 되는 요즘이다. 그 때쯤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또 치기 어린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 생각의 바탕에서 이렇게 걸어온 지금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다. 나는, 자랐다.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문장을 써야 한다. 감정을 다만 소비시키고 마는 문장은 배설 외에 무엇도 안 된다. 그러면서 이런 문장들이나 쓰다니.
2009년 4월 5일 일요일
프랑스가 자랑하는 정신 톨레랑스 tolerance는 한국에서 '관용'이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정신.
톨레랑스의 정신은 긍정.에 가까운 것인가 싶다. 나와 다른 방식을 내치지 않고, 그것이 너의 방식이라고 긍정하는 일. 타인의 방식에 동의하고 함께 하지 않아도,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간격을 다만 긍정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배운다. 오래도록, 모든 것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같은 민족이, 같은 피붙이가, 또 같은 공동체 안에서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가슴으로 안 것은 최근이었던가? 아니면 그 보다는 좀 더 일렀던가?
물론,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들도 여전하다. 나는 누가 뭐래도, 아무래도 이명박 일당을 긍정하는 일은 불가능이라고 여긴다. 개념 없는 것들 하고는.
월요일 아침부터 또 이러고 있다.
작업이나 하자.
톨레랑스의 정신은 긍정.에 가까운 것인가 싶다. 나와 다른 방식을 내치지 않고, 그것이 너의 방식이라고 긍정하는 일. 타인의 방식에 동의하고 함께 하지 않아도,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간격을 다만 긍정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배운다. 오래도록, 모든 것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같은 민족이, 같은 피붙이가, 또 같은 공동체 안에서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가슴으로 안 것은 최근이었던가? 아니면 그 보다는 좀 더 일렀던가?
물론,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들도 여전하다. 나는 누가 뭐래도, 아무래도 이명박 일당을 긍정하는 일은 불가능이라고 여긴다. 개념 없는 것들 하고는.
월요일 아침부터 또 이러고 있다.
작업이나 하자.
밀린 일들 하겠다고 작정한 일요일이다. 늦잠 약간, 청소 대충, 낮잠 조금 많이, 옥수수 삶아 먹고, 대충 빈둥거리다 보니 해 떨어졌다. 방해 안 될 음악 골라 두고 제법 밀린 메일들 답장을 부지런히 쓰니 밤이 늦었다. 밀린 일들은?
이상.이 보내준 편지 두 통의 무게감이 좋다. 나는 아직 첫 번째 답장을 쓰는 중인데 두 번째 편지가 왔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공들인 답장을 해야겠다. 어쩌나, 두어 장은 수첩에, 두어 장은 메모지에 써 두었는데. 봉투에라도 공을 들일까. 아는 사람들의 주소를 물어두어야겠다. 뭐 게으른 반군이니까, 게다가 편지는 공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거니까 그리 쉽게 쓰지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물어 두었다가 이 사무치는 봄에 사방으로 편지 날려야겠다.
결국에는 혼자 서는 것이니까, 게다가 나는 일반적.이라는 수식과는 조금 다른 모양으로 살게 되어버렸으니까, 나이.라는 게 별로 걸릴 게 없다.만, 일단 관계라는 걸 두고 보면 무시하고 지내던 숫자가 도드라진다. 더구나 존대가 분명한 한국인의 삶 속에서라면 더더욱. 부끄럽게 채워온 것 같진 않은데, 딱히 거창하게 채운 것도 없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아직 사방이 거칠고, 나는 아직 무엇이든 덤벼서 깨질 수 있을 듯한데, 사방에서 이제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시선들이 무겁다. 어쩌나. 결국엔 혼자이겠지만, 내 시작은 혼자가 아니었으니 멋대로 살 수도 없는 노릇. 기꺼이 어깨에 짊어질 주변의 무게들. 거 참, 오늘 문장들 지저분하네.
퇴고.를 시작해야겠다. 더 미룰 수 없으니까, 제법 그럴듯한 수정안도 나왔으니까, 이제 엉덩이 좀 무겁게 해서, 하루에 몇 시간씩은 꼬박꼬박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만들어야겠다.
밤이 늦었으니, 이제 일 좀 해야겠다.
이상.이 보내준 편지 두 통의 무게감이 좋다. 나는 아직 첫 번째 답장을 쓰는 중인데 두 번째 편지가 왔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공들인 답장을 해야겠다. 어쩌나, 두어 장은 수첩에, 두어 장은 메모지에 써 두었는데. 봉투에라도 공을 들일까. 아는 사람들의 주소를 물어두어야겠다. 뭐 게으른 반군이니까, 게다가 편지는 공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거니까 그리 쉽게 쓰지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물어 두었다가 이 사무치는 봄에 사방으로 편지 날려야겠다.
결국에는 혼자 서는 것이니까, 게다가 나는 일반적.이라는 수식과는 조금 다른 모양으로 살게 되어버렸으니까, 나이.라는 게 별로 걸릴 게 없다.만, 일단 관계라는 걸 두고 보면 무시하고 지내던 숫자가 도드라진다. 더구나 존대가 분명한 한국인의 삶 속에서라면 더더욱. 부끄럽게 채워온 것 같진 않은데, 딱히 거창하게 채운 것도 없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아직 사방이 거칠고, 나는 아직 무엇이든 덤벼서 깨질 수 있을 듯한데, 사방에서 이제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시선들이 무겁다. 어쩌나. 결국엔 혼자이겠지만, 내 시작은 혼자가 아니었으니 멋대로 살 수도 없는 노릇. 기꺼이 어깨에 짊어질 주변의 무게들. 거 참, 오늘 문장들 지저분하네.
퇴고.를 시작해야겠다. 더 미룰 수 없으니까, 제법 그럴듯한 수정안도 나왔으니까, 이제 엉덩이 좀 무겁게 해서, 하루에 몇 시간씩은 꼬박꼬박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만들어야겠다.
밤이 늦었으니, 이제 일 좀 해야겠다.
2009년 4월 3일 금요일

자전거 탈 때 입는 방풍 외투에 청바지, 게다가 여름용 중절모라니. 어색한 조합이네. 괜찮아. 몇 시간 후에 비행기는 바닷가에 내릴 테고, 내 작은 가방 속엔 여름 바다에 어울리는 하얀 셔츠 두 장과 움직이기 편한 반바지가 들어 있으니까.
하늘을 가득 덮은 비행기의 구름을 상상하면 될까? 하늘이 막혀서, 너무 많은 비행기 때문에 하늘이 밀려서 제 시간에 이륙할 수 없다니. 대충 책을 읽고 편지도 쓰면서 시간을 때우면 된다지만, 편지 쓰고 책 읽는 걸 꼭 고함지르며 통화하는 아저씨를 뒤에 둔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할 이유는 없잖아?
오늘의 테마는 기다림.쯤으로 하면 되나? 한 시간을 늦게 뜬 비행기에서 내려 호텔에 오니 예약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 내가 예약한 게 아니니 내가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저들끼리 엉킨 연락을 풀고 방을 마련하는 동안 너르고 높은 로비 한 켠에 구겨진다. 조급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방에 가서 할 일이란 게 널부러져 책이나 뒤적거리는 건데, 로비에도 여름바람은 불고 책은 여기에서도 읽을 수 있으니까.
짐 풀고 나를 여기까지 불러온 사람의 비서를 만나서 가볍게 차 한 잔.까지는 좋았다. 나른한 휴가에 대한 환상은 딱 여기까지. 이야기하다 보니 뭔가 박자가 안 맞는다. 행사? 촬영? 무슨 말인가? 니네 비서는 그냥 가서 골프 치라던데? 난 못 친다니까 그럼 그냥 쉬고 가라던데? 내 짐을 봤냐? 나 그냥 가방 하나로 왔단 말이다! 휴가가 아니라 일 때문에 불렀다는 통보. 나와 연락한 다른 비서와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 그냥 와서 놀고 가라던 약속은 어디 간 거지? 그럼 그렇지. 내 팔자에 무슨 골프 대회며 대가 없는 휴가라니. 더 의심하지 않은 내 탓이다. 그나저나 어쩌나, 휴가라고 떡하니 믿고 장비도 안 가져 왔는데. 일은 터져 버렸다. 호텔 행사를 주로 찍는 현지 포토에게 급하게 연락해서 장비를 빌려보려고 하지만 불가능. 사방에 수소문해도 불가능. 제발, 아무 거나 괜찮으니 DSLR 바디 하나랑 렌즈 두 개만 빌려 봐봐. 제발. 응? 내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 땀을 저들은 아나? 게눈 달린 똑딱이 DP1 하나 밖에 없다니 어디서 들은 말은 있어서
“아, 그거 라이카 아냐? 그것만 해도 좋아.”
라이카는 개뿔. 모양만 대충 네모나고 게눈이나 달려 있으면 전부 비슷한 줄 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믿어주니 고맙다.
계획을 수정하고 작전을 세우자. DP1의 결과물은 아쉬울 게 없는 수준이지만, 바디의 기계적 성능은 누구나 인정하는 최악. 게다가 28mm 단렌즈 화각. 고감도 노이즈는 상상 이상인데가, 한 장 찍으면 저장하는데 5초는 걸린다. 조루 베터리 겨우 두 개, 그리고 100장도 채 안 남은 메모리 카드. 이 일은 어쩐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어떻게든 해낼 걸 안다는 듯 바라보는 저 눈빛들을 어이 하리오. 알았다. 그렇다면, 최대한 광각의 특징을 살린 사진을 찍자. 그래서 광각의 매력을 한껏 드러내서,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하자. 그러니까 광각 하나 밖에 없다는 걸 들키지 않고, 광각의 사진만이 매력적이어서 다른 화각은 필요도 없었다는 인상을 만들어 주자. 아, 적어 놓고 보니 뭔가 그럴 듯하다.
섬에서 빛은 깊이까지 닿는다. 흐린 날 잠깐 동안 드러나는 빛 아래서조차 온갖 색들이 바로 그 색.으로 드러나고 온갖 대기의 질감도 바삭거린다.
주어진 과제는 골프대회 스케치. 그것도 한 사람만. 골프와 관련된 광고사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빛이 낮게 들어오는 이른 아침 시간을 노린 것들이다. 멀리에서부터 걸어오는 인물이 부각되고 빛은 겹쳐진 언덕들의 세밀한 질감을 화면 안에 드러낸다. 여기에서 문제는 생긴다. 내 손 안에는 심도 확보도 안 되는 28mm 단렌즈 똑딱이 하나가 들려있을 뿐이고, 그들의 상상 속에는 잡지 속 광고 사진이 들어 있을 뿐이고, 행사는 열 시에 시작해서 축하 인사 몇 마디 하고 필드로 나가니 해는 중천에 떴을 뿐이고. 적어놓으니 제법 그럴 듯했던 작전은 흔적이 없다. 실패는 단호하고 명백하다.
저녁 행사가 시작되기 전 빈 무대를 채운 남방계 밴드. 남자 셋이 악기를 연주하고 여자 보컬이 노래한다. 가수란 멋진 사람들이다. 무엇도 없이 오로지 목소리 하나로 공간의 질감을 바꾼다. 그러니까 그 작은(또는 큰) 몸 안에 거대한 힘을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필요하면 그저 소리를 열어내면 끝이다. 한 방이다. 장비 안 가져왔다고 한 방에 바보가 되어버린 사진가는 괜히 작아진다. 노래를 배워볼까?

마지막 날은 일정이 없고 돌아가는 비행기는 저녁 예약이라 종일 빈둥거린다. 아침 먹고 바닷가에 누워 제대로 노닥거리기. 바람이 세게 불어서 모래가 온 몸으로 침투한다. 파도도 높다. 저 바다 속으로 러시아 관광객들과 중국 관광객들이 뛰어든다. 제 돈 주고 왔다면 나라도 시간 아까워서 한 번이라도 더 바닷물로 뛰어들겠다만, 아침부터 바닷물에 뛰어들 생각은 별로 안 난다. 게다가 흐린 하늘에 이 바람에서야. 대신 점심 먹은 뒤부터 오후 시간 내내 호텔 수영장을 전세 내기.
반바지를 벗고 슬리퍼도 집어 넣는다. 짐 정리하고 상하이로 돌아가서 입을 외투를 다시 챙겼다. 체크 아웃 전 마무리는 야외 테이블에서 라면 한 그릇이다. 바람이 좋다. 이 바람 앞에 왜 조금 더 일찍 나 앉지 못 했다 싶은 바람이다. 걱정했던 일은 끝났다. 돌아가서 작업해 보아야 정확한 사태를 짐작할 수 있겠지만, 마무리는 된 셈이다. 그랬다. 모든 시간은 지나간다. 그래서 가끔 힘들 때는 ‘지금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대부분의 버티기는 일종의 성취감으로 이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지금을 버티자’ 정도까지는 봐 줄 만한데, ‘’어떻게든’ 지금’만’ 버티면 된다’는 정도까지 가면 이건 좀 문제가 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버티기의 반복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조금씩 허문다. 그렇게 버텨서 얻어낸 결과물이 기대치를 만족시키는 경우는 많지 않다.
모든 지나가는 시간 앞에서, 나는 그 모든 마디에서 힘주어 디디고 싶다.
파란만장 하이난 출장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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