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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5일 토요일

샤워하다가 불쑥 드는 생각.

사람들은 왜 '그리스인 조르바'에 열광했던 것일까? 아마 이윤기의 번역이었던 듯한데, 번역가 스스로도 자신의 번역에 상당히 만족스러워했고, 읽는 입장에서도 말의 맛을 잘 살렸다는 느낌이었던 듯한데, 번역의 문제를 떠나서, 왜 사람들은 한 명의 그리스인을 그토록 사랑했었을까?

되는대로 막 산 것 같은 인상에,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그렇게 나이 든 인물. 아마 그 대충 산 것 같은 삶을 관통하는, 사실은 단단한 어떤 삶의 고집 같은 걸 사랑한 것일까? 성인들이 보여주는 삶이 위대하기는 하나 일반인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있는 것이라면, 조르바의 삶은 나와 동시대를 호흡하고 바로 옆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도달한 어떤 경지였기 때문 아닐까? 뭐 어쩌면 쉽게 닿을 수 있겠다는 친근감이었을까? 작은 일에 감동하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호기심을 느끼고, 자신에게 솔직하고, 옳지 않은 것에 분노하고, 어떤 계산도 없이 좋아하는 대상을 마음껏 사랑하고, 자신의 가치와 본질을 스스로 잘 알고, 삶 앞에 한 치 주저함도 없이 당당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성인들의 삶이 모든 유혹을 끊어내고 스스로를 가두는 과정을 통해 완성에 도달한다면, 조르바는 삶 속의 모든 유혹과 화해하면서 마침내 이루어낸 경지에 닿았기 때문일까? 소설에 등장하는 조르바의 죽음은, 성인의 죽음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힘찬 발걸음으로 창문가로 가서 호탕하게 웃고는 그 자세로 죽었다지 않나. 그 웃음은 마치 '다 이루었노라' 내지는 '한 세상 잘 살았다' 정도가 아니었을까.

사실 이 아침 가장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샤워기 밑에 서서 왜 갑자기 조르바가 생각난 것일까?

2009년 3월 15일 일요일

장 그르니예, 섬

장 그르니예, 섬

얇고 낡은 책이다. 종이는 바래서 누렇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함유선의 번역으로 1992년에 발행된 10쇄판이다. 조금 큰 수첩 크기의 책에는 사방 여백이 많고 글자들은 가운데 모여 있다. 글자들은 가장자리로부터 점점 바래가는 종이의 여전히 흰 부분으로 도망쳐 모여든 것 같아서 겨울 강에서 다리 아래 아직 얼지 않은 물로 모여서 추운 한 계절을 나는 고기떼를 닮았다.
제대할 때 부대에 있던 책 중에 몇 권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 중에 한 권이다. 지금도 책 앞에는 분류번호가 붙어 있다. 아끼는 책 중에 한 권이다. 아낀다기 보다는 든든한 책이고 든든하기 보다는 귀한 책이다. 가벼운 듯 깊은 사색의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시니 소설이니 하는 문장의 구분은 부질 없어 보인다. 언제나 까뮈의 이름을 업고 소개되는 장 그르니예는 까뮈의 문학적 스승이라고 알려져 있다. 까뮈의 문학적 성취 덕분에 더불어 알려질 수 있었으니까 장 그르니예는 까뮈에게 고마워할까? 아니면 언제나 까뮈라는 이름에 빌붙어 등장하며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 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할까?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화난 감정은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다. 책에는 물루.라는 고양이 이야기가 한참 동안 나오는데, 지극정성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고양이가 어느 날 나가서 심하게 다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사를 해야 할 상황에 닥치고, 결국 고양이를 안락사 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렇게 사랑한다던 고양이를 결국 안락사 시킨다는 결정은 위선이었고 기르던 동물의 삶을 마음대로 끊어낸다는 것은 인류라는 종족이 가진 오만이었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시간은 흘렀다. 몇 년이나 흘렀다. 물루는 여전히 안락사 당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분노하지 못 하겠다. 그 안락사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은 여전히 못 할 짓이지만, 다만 작가의 생각을 긍정해 주기로 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을 알겠다.

책 퇴고 방향을 정했다. ‘상하이에 가 본 적 있습니까?’라는 가제를 가졌던, 이 도시에 대한 오로지 깊기만 한 열 두 꼭지의 문장으로 완성하겠다던 책은 여러 편집자와 출판사를 만족시키지 못 했다. 그러는 사이에 몇 달이 지났고, 예상했던 대로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원고의 부족한 부분들은 여름 풀처럼 자라서 이제는 사방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아, 이런 부족한 글을 묶어 책을 만들겠다고 했었구나. 그렇게 여기저기 보였었구나, 생각하니 부끄럽고 할 수 있다면 이미 나간 원고들을 모두 거두어 들이고 싶다. 책 속의 문장은 거칠고 서투르고 고집스러웠다. 그리고 괜히 힘 준 어깨마냥 높기만 했다. 책을 읽을 사람에 대한 고려도 없이 나는 그 사람의 책장만 생각했다. 어느 책장이든 내 책이 자리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다는 고집만 부렸다. 책은 ‘상하이, 7년의 여행’이라는 가제목으로 바꾼다. 한 명의 풋내기 졸업생이 어엿한 병아리 사진가가 되어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무대로서 상하이는 다른 곳과 구분되어 도드라지는 매력을 드러낼 것이다. 상하이에 왔던 초기의 자료들을 찾기 위해 예전에 홈페이지로 쓰던 사이트를 열었다. 좀처럼 보지 않는 곳이다. 아, 그 곳의 나는 서투르고 섬세하고 따뜻했다. 그 때의 연장선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지금의 나와 어떤 연관성도 없는 듯 했다. 언젠가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싶게 부러운 모습이었다. 조금 엉성하긴 했지만, 그 때 문장이 지금보다 어쩌면 나았구나 싶기도 했다. 어찌나 위트 있는 문장을 구사하셨던지.

모나님과 쥐루 누나가 동시에 사다 준 손지연의 음악을 오늘 아침에야 들었다. 앨범 갖고 싶다고 에프상하이 게시판에 칭얼거렸더니 한국 다녀오시는 모나님이랑 한국에서 잠시 여행 온 쥐루 누나가 동시에 사다 주었다. 그것도 절판 된 2집을 뺀 1,3 집만. 차마 말은 못 하고, 두 분께 고맙게 받았다. 아직 서로는 이 사실을 모른다. 영원히 모르시기를.
마음에 드는 음악을 제대로 듣기에는 너무 늦지 않은 저녁시간이 좋다. 일정 공간을 제대로 채워 좋은 소리를 내려면 좋은 앰프 좋은 스피커도 있어야겠지만 좋은 공간도 있어야 하고 또 공간에 알맞은 볼륨이 되어야 한다. 내 집 거실에서 듣기 좋게 음악을 들으면 아랫집 윗집 눈치를 살짝 보아야 한다. 내가 워낙 민폐 끼치는 걸 못 하는 성격이니까 따지고 보면 내 걱정만큼 두 집이 신경을 쓰진 않을 것 같다만, 게다가 중국이니까 옆집에서 고성방가를 해도 뭐라고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눈치 살피는 나의 소심함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고른 시간이란 게 대기가 가라앉은 저녁 시간, 그 중에서 남들 잠들기 전이어야 되니까 대충 저녁 7시부터 9시 정도가 된다. 씨디를 받은 후 좀처럼 이 시간대에 집에 있을 여유가 없어서 씨디는 탐스러운 먹거리처럼 책상 위에서 개봉을 기다렸다. 더 기다리기 싫어서 오늘은 부러 새벽에 일어나 미리 앰프를 예열시키고 다른 일거리 좀 마친 후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밤 시간만큼이야 못 하겠지만, 아, 좋구나. 원고 정리하면서 들으려다가 양쪽 다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냥 컴퓨터 밀어두고 음악만 들었다. 들으면서 슬쩍 이 음악을 어떻게 사진스터디에 써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김소월의 시와 비교해서 설명하면 되겠구나 싶어서 얼른 메모했다. 새로 시작한 스터디에는 제법 십 수 명이 참가하고, 배우려는 분들의 욕심도 대단해서 그 눈빛들과 마주치는 일은 즐겁다. 이번 스터디에서 나는 카메라 기초만 하기로 했는데, 그러니까 강평까지 넘어가면 사실은 월권이 되겠지만 그래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으니 해야겠다.



그만 쓰자. 잡담이다. 얼른 책이나 쓰자.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 효형출판
1998 7월 초판 발행
2006 6월 2판 4쇄 발행

내가 사는 집 화장실 변기 뒤에는 책이 두어 권 있다. 화징실 책들은 오래 간다. 보통이 두어 달이다. 유시민의 경제학 책은 족히 대여섯 달쯤 되었다. 아침마다 변기에 앉아 있는 잠시 동안에 읽는 것이 고작이니까 끽해야 하루 한 두 장이다. 거의 모든 장 모서리마다 접혀있다. 모든 장마다에서 멈췄다는 뜻이다. 건축에 대한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책은 화장실책 출신이다. 출신.이라고 밝혀두는 것은 출신과 현재가 다르다는 의미다. 책이 1/4쯤 남았을 때 화장실에서 가져 나왔다. 아침에 인터넷 기사 하나 보고,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어서 해야겠다 싶었다.
입만 열면 똥내가 나는 이명박의 말이었다. 지방 행정관청들이 왜 그리 높은 로비를 가진 그럴듯한 건물을 짓냐는 야단이었다. 경제도 어려운데 그런 쓸데없는 돈을 쓰지 말라는 딴에는 근검 절약하는 소리였다. 앞으로는 공공기관 건물을 아파트처럼 지으라신다. 아침 식사하시던 이 땅의 많은 건축가들 혈압 좀 올랐겠다. 천박하다. 말끝마다 그 기본 없음이 절절히 드러난다. 그 서툰 입을 변호한다는 자들의 입 또한 다를 것 없다. 알고 속이는 것들은 더 나쁘다. 아, 이명박의 입에서 똥내 난다는 말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맞춤법도 무시하는 것이 예사니 문학이란 것도 알 리 없겠구나. 비유법이라는 것이다. 나 잡아가지 마라.

건축가가 쓴 에세이다. 서현.이라는 이름이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는 연예인처럼 이름난 몇몇 건축가의 이름을 내 장식처럼 아는 것이 고작이라서 이 이름은 처음이다. 검은 표지의 책은 한 권의 건축물 같다. 그 구조의 단단함이 잘 지어 올린 한 채 집 같다. 차례만 보아도 책의 단단함을 알 수 있다. 공간을 정의하고, 공간을 장악하고 또 비례를 맞추고 공간 속의 비어있음에 대해 말하고 공간을 구축하는 질서와 질서의 단단함, 그리고 공간을 감상하는 겸손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아무런 실체 없이 흐느적거리는 감상으로 질척거리는 책들이 많은 요즘에, 이 책은 단단한 실체와 실체를 꾸미는 정돈된 문장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단단하고 고운 문장들이다. 도대체 건축가라는 사람이 문장을 이렇게 잘 써도 되는 것인가? 건축가이기 때문에 이런 군더더기 없고 잘 구축된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땅의 건축가들은 모두 이런 문장을 구사한단 말인가? 책 읽는 순간마다 내가 쓴 문장에 생각이 닿아서 부끄러웠다. 내 글은 어땠는가? 출판하겠다고 끄적거린 문장들에 대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글이 너무 어지럽다’는 지적을 몇 곳에서 들었다. 제대로 된 설계도 없이 시작한 글이어서 그렇다. 기존에 써 두었던 인터뷰도 끌어오고 여행기도 가져다 붙이고 버리기 아까운 메모들도 끼웠다. 여기서 나무 토막 하나 저기서 벽돌 한 장 식으로 주워서는 보기에만 그럴 듯하기를 바라며 얼기설기 지어 올린 집이 된 모양이다. 아, 허물어야 하나. 그럴 용기도 없다만.

상하이의 빌딩들은 그 모양이 제각각이다. 건축법으로 정해놓아서,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은 그 디자인이 반드시 다른 것들과 달라야 한다. 그렇게 건축하려고 들면 설계비부터 해서 완공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더 많은 공사비가 들 것인데,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현재의 상하이를 보면 누구나 공감하게 된다. 서로 다른 모양의 건물들이 모여서 만든 상하이의 빌딩 숲은 보기에 좋다. 건축을 모르는 입장에서, 나는 건축가의 고민은 어떻게 좀 더 다르게 보일까? 어떻게 좀 더 그럴 듯하게 보일까? 정도가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러 건축가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건축이란, 사람의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건축가가 어떤 동선을 짜느냐, 어떤 방식으로 층을 올리느냐에 따라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바뀐다. 그래서 건축이 위대하고 또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땅 위에 직립하고 선 빼곡한 건축물들 속에는 당대의 삶에 대한 건축가의 치열한 고민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의 종착지는 건축이라던 바우하우스의 선언은 제법 맞는 말인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길 걸으며 보는 모든 건축물들을 다시 본다. 그 정신까지 읽어내는 것은 요원하겠지만, 그래도 건축의 정신을 보려는 내 시도가 반갑다.

2009년 1월 8일 목요일

장진 희곡집 시나리오집


장진 희곡집 장진 / 열음사 / 초판 1쇄본 2008. 1. 15
장진 시나리오집 /장진 / 열음사 / 초반 1쇄본 2008. 7. 10


연극의 경우, 무대 위에서 발산되는 맥베스의 아우라와 배우의 아우라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분리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화 촬영의 특성은 관객의 자리를 카메라가 대체한다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배우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소실되어 버리고 그와 함께 배역의 아우라 역시 사라져 버린다. …… 연극배우는 배역의 성격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영화배우의 경우 이런 동일시의 기회는 거의 부정당한다. – 발터 벤야민,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예술의 각 장르는 그 마다의 문법을 갖는다. 현대예술은 보이지 않은 것, 말할 수 없는 것, 말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려는 듯하다. 다른 장르와 구분되는 영화만의 문법은 무엇일까? 소설이어도 되고 연극이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아니면 안 되는, 그래서 꼭 영화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진.은 제법 잘 나가는 연극 연출가이고 또 영화감독이고 또 시나리오 작가다. 배우도 하던가? 그가 만든 영화에는 장진스러움.이 잘 드러난다. 영화가 왜 꼭 영화라는 형식을 빌어야 하는 것일까? 그 내용을 글로 써 두면 안 되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장진의 영화는 그럴 듯한 답을 전하고 있다. 팀 버튼 감독이나 워쇼스키 형제쯤 되면 그들의 문법은 참 영화스러워서 다른 장르로 옮겨보려고 해도 쉽지 않다. 영상의 힘이고 또 영화라는 틀에 잘 들어맞는 이야기의 힘이다. ‘아는 여자’를 보며 더욱 크게 느낀 장진.스러움 역시 영화만의 문법을 잘 적용시킨 것으로 보였다. 연극판에서 단련된 이야기의 힘, 리듬을 타는 능력이 빚어낸 결과라고 본다. 전봇대를 타고 전기 위에 실려 전해지는 사랑.을 누가 상상했을까? 그게 소설이라면, 그게 사진이라면, 음악이라면, 행위예술이라면, 설치미술이라면?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장황하게 쓰는 것은, 사실 그 확연함이 정말 확연한 것인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극과의 차이라면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영화라는 예술이 처음 등장한 무렵 발터 벤야민은 영화와 구분되는 연극의 힘을 위와 같이 썼다. 그의 글이 연극에 대한 일방적 찬양이거나 영화에 대한 비판인 것은 아니고, 다만 연극을 변호하는, 연극을 본 적 없고 연극을 멀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연극의 힘을 멀게나마 전해줄 수 있는 문장이어서 옮겨 왔다. 나도 제대로 연극을 본 적이 없다. 무대의 현장성이라고 하면 되나? 그리고 배우의 호흡이 닿는 가까운 거리라고 하면 되나?

시나리오집에는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소나기는 그쳤나요?, 고마운 사람, 거룩한 계보, 아들, 공공의 적 1-1: 강철중. 모두 7편의 영화 대본이 실려 있고, 희곡집에는 아름다운 사인, 박수 칠 때 떠나라, 택시 드리벌, 웰컴 투 동막골, 서툰 사람들.까지 5편의 연극 대본이 실려 있다. 시나리오집에 있는 것들 중에는 단편 2편을 제외하면 모두 영화로 본 것들이고, 희곡집에 있는 것들 중 박수 칠 때 떠나라.와 웰컴 투 동막골은 영화화 되어서 또 본 것들이다. 이미 본 영화는 대본 사이사이가 모두 장면으로 떠올라서 상상의 공간이 적었고, 아직 보지 않은 희곡들은 연극에 서툰 나로서 어떤 무대도 그려낼 수 없었다. 이야기를 현실에 들러붙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사이마다 치고 빠지는 위트를 기발하게 구사하는 대본들은 따로 떨어져 있어도 통째 하나의 작품인 것처럼 닮은 색깔을 낸다.

다른 생을 살게 된다면, 연극 배우는 한 번 겪어보고 싶은 직업이다. 무대 위의 배우도 멋지고, 배우를 움직이게 하는 글을 쓰는 일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2009년 1월 1일 목요일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읽은 책에 대한 후기를 제대로 정리하기 시작한 때는 군대에 있던 무렵이었다. 중반 이후에는 워낙 할 일이 없었으니까, 4층에 있는 경목실에 가서 책을 빌려 읽고, 읽은 책의 후기를 모으는 작은 카페를 열었었다. 잊은 지 오래 되었다. 사이트 주소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 때 쓴 문장들을 다시 보면 참 부끄럽겠다. 애써 다시 찾지 말아야겠다.

유학생들에 대한 책임감은 항상 느끼는 부분이다. 에너지가 있는 사람은 저 혼자 잘나서된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조금씩 빌려주어서, 그렇게 조금씩 빌려와서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에너지를 갖는다고 믿는다. 그러면 그 에너지를 써서 성장하고, 성장한 후에는, 또는 성장하는 중에라도 다시 주변으로 내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가진 자의 마땅한 의무다. 개인적으로 대학생활을 통해 내가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교수님들이 계셨고 또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재미있는 공부도 있었다. 중국의 유학생들을 볼 때 그들이 누리지 못 하는 대학생활의 깊이가 언제나 아쉬웠다. 대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고민들, 대학생이라면 읽어 보아야 할 책들을 아무도 일러주는 사람이 없다. 풍성한 길로 끌어주는 사람도 없다. 대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이제 행동으로 옮길 때다. 대학생활을 통해 내가 받은 혜택을 이 곳의 학생들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책 읽는 모임을 만들자는 소식을 듣고 얼른 동참했다. 그리고 첫 모임에서 유학생들을 참여시키자고 말했다. 유학생 사이트 두 곳에 관련 공지를 올렸고, 오늘까지 네 통의 메일을 받았다. 메일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부족함에 대해 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하고 싶다고 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성장을 확신한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책 읽기 모임이 처음으로 선정한 책이다. 시간에 맞춰 책을 구할 수 없어서 제본해 읽었다.

국방부는 왜 이 책을 불온서적으로 정했을까? 책을 광고하려는 지능적 안티였을까? 표면적으로 읽자면 반미를 선동하는 책이라는 것이 그 이유일 텐데, 이 정부 하는 일이 대부분 그렇듯이 웃기는 작태다.

장하준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가 외치는 논리의 허구성을 실증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철저기 깬다. 책 읽으며 중간중간 정리하지 않고 다 읽은 후 감상문식으로 쓰려니 대충의 얼개만 기억날 뿐 세세한 내용들은 흐리다.

안재흥 선생님은 세계화에 대해 강의하실 때 국제화와 세계화를 구분하셨는데, 국제화는 여전히 국가를 그 행위 주체로 보고, 세계화는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움직임으로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세계화에 대한 책이기보다는 국제화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야 옳다. 국민국가 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국민국가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얼른 그 시대가 마감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앞으로 제법 긴 시간 동안 국민국가를 국제관계의 행위 주체로 설정하려는 모양이다. 장하준의 논리 전개는 국민국가를 그 중심에 둔다.

그리고 경제 논리로 정치를 덮는 방식은 위험해 보였다. 경제 발전을 위해 일정 부분의 부정부패를 용인한다는 발상은 정치로 옮겨가면 전 국가의 부패를 불러오고 정의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 우리는 이미 그 현장을 목격하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 책은 개발도상국들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적극적인 자국 중심의 경제를 운영하거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개과천선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분명한 힘의 논리 속에서 전자는 쉽지 않아 보이고,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 자본의 속성상 후자도 만만찮아 보인다.

책 중간에 내 메모는 대부분
“명박아……”
“그런데 명박이는……” 하는 식이었다.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알고 있어야겠다. 언젠가 때가 올지 모르니까.

게으른 반군.
멋대로 감상.